미국의 경제 지배자들

경제흐름 2013.06.30 11:17

미국의 경제 지배자들

 

 

밴더빌트 가의 사람들은 모두 성과 같은 저택을 소유하며 미국 최대의 부자 가문으로 군림해 왔다. 일가가 대부호가 된 초석을 마련한 인물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제독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794년에 태어나 미 육군의 수송과 관련한 이권을 바탕으로, 전설에 따르면 뇌물 등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증기선과 철도와 관련된 일대 제국을 세웠다.

 

 

1877년에 사망했을 때 그가 남긴 유산은 1억 달러에 이르렀다. 1880년 통계에서 미국 전체 국립은행의 총 예금액이 8억 3,400만 달러였으므로 10% 이상을 밴더빌트가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금액을 20세기 말 시가로 환산하면 거의 1,000억 달러나 된다! 이는 12조 엔을 웃도는 경이적인 액수이다. 그러나 국민 전체의 생활 수준이 훨씬 낮았던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10배 이상, 즉 100조 엔은 족히 넘는 경제적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밴더빌트 가의 자산 분배는 그 성을 지닌 일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윌리엄 밴더빌트의 첫 부인 앨버는 영국의 말버러 공작인 찰스 스펜서 처칠(Charles Spencer Churchill)에게 딸 콘스엘로(Consuelo)를 시집 보내려고 했으나 딸은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앨버는 격분하여 “그 남자를 죽이고 나도 목을 매어 죽겠다”고 협박하였다. 콘스엘로는 어쩔 수 없이 공작과 결혼하였다.

 

 

처칠 총리의 아들 랜돌프 처칠(Randolf Churchill)의 부인이 바로 남성 편력으로 유명한 파멜라 딕비(Pamela Digby)였다. 파멜라는 그와 이혼하고 또 하나의 철도왕 가문에 속하는 W.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로 인해 나중에 해리먼 미망인이 된 그녀는 1992년 민주당 전국의장이 되어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Bill Clinton)을 대통령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클린턴 정권에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에 취임하였고 1998년에 사망하였다.

 

 

이 가문을 세운 원조 어거스트 벨몬트의 부인 캐롤라인 페리(Caroline Perry)의 부친이 바로 검은 함선으로 우라가(浦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요쿠수카시의 옛 지명)에 내항한 제독 매튜 페리(Matthew Perry)였다. 페리 제독의 동생 너새니얼 페리(Nathaniel Perry)의 손녀 조세핀(Josephine)의 남편은 미국 제일의 금융왕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의 조카이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Jr.)이다.

미국 제일의 부호 밴더빌트 가와 페리 제독이 어떻게 이런 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함선이 찾아온 우라가의 주민이었다. “태평한 잠을 깨우는 증기선, 불과 4척에 잠이 오지 않는구나”하는 노래로 불리어진 증기선 사스케하나호를 타고 일본에 건너온 사람은 페리 제독이었지만, 대양을 항해할 대형 증기선 66척을 소유하여 미국을 지배한 사람은 원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성한 보스턴의 재벌 페리 가문의 자손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가 1994년 1월부터 클린턴 정권의 국방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즉시 북한 핵 의혹 위기를 부추기며 미․일 신 가이드라인 성립을 위한 군사적 긴장을 조장했고, 1997년 1월 장관 퇴임뒤에도 1999년까지 북한 핵 의혹 문제를 둘러싼 정책조정관으로서 한국․북한․일본․중국을 정력적으로 오갔다. 그는 가이드라인 성립 뒤에 “북한은 혐의가 없었다”며 무책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페리는 군수 기업인 GTE 실베니아(GTE Sylvania) 임원을 맡은 뒤 스스로 ESL이라는 군수 기업을 창업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7년부터 국방부 기술 자문을 10년간 수행하여 1977년부터 카터 정권에서 국방 차관이 되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북한 문제와 관련된 외교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재벌이 배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페리 자신은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보이지 않는 전투기 스텔스‘의 기술 개발로 스텔스를 만든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는 스탠퍼드대학교 국제안전보장군비관리센터의 소장을 맡아, 표면상의 직함은 고리타분한 수학자였다. 하지만 이면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투자은행 함브레히트 & 퀴스트(Hambrecht & Quist)의 경영자로서, 또 군수기업인 ’기술전략연합사(Technical Strategies & Alliances)' 회장으로서 거대한 사재를 축적하였다. 이라크 군사 분쟁과 아시아의 긴장, 그리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공격이 부의 축적을 가능케했다.

 

 

일찍이 금융왕 JP 모건은 이렇게 말하였다.

“100만 달러를 버는 것은 바보라도 할 수 있지만, 머리를 쓰지 않고서는 그것을 유지할 수 없다.”

 

 

1919년에는 스탠더드 석유사(Standard Oil Co.)를 통해 전국 정유업계의 90%를 독점했던 석유왕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최대의 납세자였다. 소득세가 처음 공개된 것은 1925년으로 존 D. 록펠러 2세는 628만 달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260만 달러, 그 아들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216만 달러씩 세금을 납부하였다.

10년이 더 지난 1929년, 윌가에 대폭락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잃은 가운데 부의 집중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2년 뒤에 열린 하원 상무위원회에서는 당시 미국 최대의 자산이었던 철도의 85% 정도를 15개의 기업집단이 소유하고 있다는 불평등 문제가 지적되었다. 그 집단이란 밴더빌트․모건․해리먼․휘트니․스탠더드 석유사의 간부들이었다.

한편 1935년에는 독신이나 세대 구성 여부를 망라하고 미국인의 47%가 연간 수입이 1,000달러 이하였다. 1937년에 사망한 존 D. 록펠러의 유산이 10억 달러로 이야기되던 시기다. 미국 총인구의 절반인 6,400만 명이 열심히 벌어들인 총액은 밴더빌트 일가․모건 일가․록펠러 일가 등과 같은 최고 소득자, 즉 인구 대비 1.5%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의 소득과 같았다.

 

 

1929년 9월 3일 허버트 후버(Herbert C. Hoover) 대통령 재임시에 기록된 최고치 381.17달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한동안 깨지지 않았고, 한국전쟁 종전 뒤인 1954년이 되어서야 400달러 대를 기록했다.

이렇게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5,000만 달러를 소유한 최고 소득자의 자손들이 전국에 수백 명씩 존재하게 되었다. 이 기준을 1,000만 달러로 내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의 자산은 거의가 유산 상속으로 이룬 것이었다.

 

 

대부호 듀퐁 가는 피엘 새뮤얼 듀퐁(Pierre Samuel du Pont)이 프랑스에서 도미하여 미국 독립을 지원해 군수 재벌을 세웠다. 260년 전인 1739년 생인 듀퐁의 자손은 1986년 시점에서 1,700명으로 늘었다. 화약 제조로 남북전쟁에서 거재를 이룩해 ‘죽음의 상인’으로 불린 듀퐁 가는 가문의 지주회사 크리스티애나 시큐러티즈(Christiana Securities)를 세워 개인 자산을 관리해 왔지만, 1977년 그 자산이 듀퐁사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손실을 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도 초대 자손 약 300명이 듀퐁사 주식의 15%, 시가로 약 100억 달러 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20세기가 되고 드디어 1909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과세법이 미국의회를 통과하였다. 1911년에는 독점 방지를 위한 트러스트 해체가 실행되어 록펠러 가의 스탠더드 석유나 듀크 가의 아메리칸터바코(American Tobacco) 등이 몇 개의 회사로 분리되었다.

1912년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여 1,5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1등 객실에 탔던 부자들은 많이 탈출했지만 3등 객실에 있던 사람들은 배에 갇혀 많이 사망한 사실이 여론을 자극하여, 이듬해인 1913년에는 개인에 대해 일정한 소득세를 징수하게 되었다.

 

 

1930년대 금융 공황의 와중에 새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부유세’를 도입하였다. 그러자 부유한 계층은 더욱 소득을 숨기기 시작하였다. 루스벨트가 밴더빌트의 요트에 초대되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부호들은 호화 요트를 구입하고 사실상 탈세를 시도해 카리브해의 면세국(택스헤이븐)에 소득을 은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치하에 실시된 뉴딜 정책은 대재벌을 소멸시키고자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유산 추정액 10억 달러에 대해 91%라는 높은 상속세를 매겼다. 나아가 1941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직후부터 기업에 대한 소득세율이 50% 전후로 대폭 인상되었다. 조금씩 빈곤 계층에 유리한 민주적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제정된 세입법이 최초의 대중세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 제도’라는 미명 아래 자택 수영장․호화 요트․렘브란트(Rembrandt)의 그림 같은 미술품 등은 수입을 발생시키지 않는 자산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자산가는 거기에 투자함으로써 면세 혜택을 누려 온 것이다.

 

 

이레네 듀퐁(Irenee du Pont)은 듀퐁사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사용한 폭약류의 40%를 제조해 죽음의 상인이라 불렸다. 그는 모건 상회와 공동으로 제너럴모터스(GM)를 인수한 뒤 1963년 유산 4,000만 달러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이레네 듀퐁의 아들 이레네 주니어는 1998년 현재 자산이 5억 2,500만 달러인 부자이다.

 

 

그러면 지난 50년 동안의 다우 평균 주가의 ‘장기 실적’을 살펴보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의 최저치가 162.60달러였다. 그랬던 것이 50년이 지난 1999년 8월에는 앞서 말한 최고치(약 70배)를 기록하였다. 이 실적을 복리로 계산한 은행 금리로 환산하면 연리 8.86%에 해당한다. 평균적으로 50년 동안이나 매년 9%에 가까운 주가 상승을 계속했으므로 경이적인 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밴더빌트가 사망한 때는 1877년으로 유산이 1억 달러였다. 그로부터 122년 뒤인 1999년 현재 불법 투기가 없다고 가정해도 3조 1,392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개인 자산만으로 비교해도 「아메리칸 헤리티지(American Heritage)」지에 따르면,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 40인에 드는 사람은 1998년 「포브스」가 선정한 억만장자 400명 가운데 빌 게이츠를 포함해 3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대부분의 미국 자산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잡지는 세습 재산을 뜻하는 ‘헤리티지’란 말답게 미국의 보수적인 유산 상속인들의 잡지이다.

 

 

1998년의 자산가치

1위 석유왕 존 D. 록펠러 1,896억 달러

2위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1,005억 달러

3위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959억 달러

4위 호텔왕 존 제이콥 애스터 780억 달러

5위 미디어왕 빌 게이츠 617억 달러

도표 2.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 순위

 

 

 

뉴욕 증권 거래소는 미국 정부가 ‘독립전쟁’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거래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1792년 5월 17일 24명의 상인들이 설립하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거래소에서는 죽음의 상인 듀퐁의 화약과 총 등 군수 물자에 대한 투기가 과열되었고, 전쟁중인 1863년 뉴욕 증권 거래소로 명명되었다. 바로 지금의 월가는 두 차례 일어난 전쟁의 소산으로 탄생한 것이다.

 

 

도둑 귀족 밴더빌트는 많은 내부 정보를 주워들으며 모건 상회 특권자로서 특별한 배당을 받았고, 그에 더하여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로부터 파격적인 리베이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보유 자산 1위는 애스터 가의 1조 6,459억 달러, 2위는 록펠러 형제, 3위는 밴더빌트가, 4위는 멜런 형제가 차지하였다. 참고로 듀퐁 가와 모건 가도 표시하였다.

 

 

미국의 유산 상속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미국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확립된 부국과 빈국간에 빈부 차이가 없어지면, 이자율의 국제적 가치가 떨어진다. 그 결과 금리나 주식의 상승률이 저하하면, 유산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유럽과 미국의 부호 사회가 투자하고 있는 증권의 가치가 엔/달러 같은 환율의 급변으로 인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큰 공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월가에 투자하면서 여유 자금을 사용해 금․은․다이아몬드 등과 같은 귀금속을 구입하고 있다.

 

 

401(k)란 미국 정부가 내국세법 제401조의 K항을 근거로 도입한 기업 연금 제도로 고용주의 분담금과 종업원의 적립금을 매달 연금으로 불입하는 기업 연금의 한 종류이다.

현재 401(k)에 가입한 미국 기업의 종업원 수는 무려 3,000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운용자산 규모도 1조 달러에 이르고 있다. 401(k)는 일본에서도 2000년 중에 도입이 검토되고 있으며,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시행이 될 것으로 보인다.

401(k)는 부금의 갹출액이 확정되어 있는 연금 제도였다. 이 연금 제도에서 부금의 운용은 가입자 개인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따라서 운영 여부로 미래의 연금액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노후 생활을 자신이 책임지는 ‘자기 책임의 원칙‘을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401(k)는 연금 상품의 특성상 장기간 증권시장의 수요 기반이 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결국 증권시장의 안전성과 성장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100년 전인 1900년에 벨기에 령 콩고에서, 1912년에는 포르투갈령 앙골라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의 최대 소유자가 된 미국인 토머스 포천 라이언(Thomas Fortune Ryan)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1928년 사망할 당시 유산은 1억 3,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라이언은 전세계의 광산을 지배한 구겐하임(Guggenheim) 재벌과 함께 활동하여 그만한 자산을 형성하였다. 1912년 타이타닉 호를 타다 차가운 바다에서 생을 마친 광산왕 벤저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의 회사에서는 광산 노동자가 시급 5센트로 일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일급은 타이타닉 호 침몰 당시 최고 1.8달러였으므로 365일 일해도 1년에 657달러밖에 안 되어, 끊임없는 파업이 일어나고 있었다.

샤갈․모딜리아니․피카소 등의 명화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전쟁 중이던 1943년에 벤저민의 형 솔로몬 구겐하임 (Solomon R. Guggenheim)이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1959년 완성한 뉴욕에 있는 미술관이다. 타이타닉 호에 사망한 벤저민의 딸 마르그리트(Marguerite, 통칭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는 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하였다.

 

 

 

100년 전, 구겐하임 일가에 융자하여 광산 이권을 확장한 이는 윌리엄 휘트(William Whitney) 해군 장관이었다. 그의 아들 해리(Harry F. Oppenheimer)는 앞 장에서 말했듯이 거트류드 밴더빌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뉴욕의 맨해턴에서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유명한 휘트니 미술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휘트니(Cornelius Vanderbilt Whitney)가 바로 광산 회사인 허드슨 베이 마이닝 & 스멜팅(Hudson Bay Mining & Smelting)을 창업한 휘트니 금속 재벌의 호주였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금을 교환함으로써 무역 수지 결제를 할 수 있는 금본위제에서는 환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금본위제의 형식상의 필요론이다.

 

 

1998년까지 계속된 금 가격의 침체는 분명 인위적인 세계 전략이었다.

금 업계는 남아공의 오펜하이머 일가가 움직여 왔다. 일찍이 영국인 다이아몬드 왕 세실 로즈(Cecil Rhodes)가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을 받고 1888년 드비어스를 설립해 아프리카 남부 전역을 지배하였다. 그의 사후인 1917년에 어니스트 오펜하이머(Ernest Oppenheimer)가 앵글로아메리칸을 설립해 남아공의 광구를 완전히 지배한 이래 아들 해리를 거쳐 3대째 니콜라스(Nicholas F. Oppenheimer)에 이르렀다. 「포브스」에서는 니콜라스 오펜하이머가 1999년 1월 드비어스 회장에 취임하여 공칭 자산 28억 달러(3,360억 엔)라고 보도되었다.

 

 

금본위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의 힘은 종이(지폐)에 있다. 전례 없는 월가 호황을 맞게 되면, 기축 통화인 달러 지폐를 마음껏 찍어내서 재벌들이 마음껏 금과 광구를 몽땅 사들일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이권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

 

 

1999년 1월 1일에 유럽 경제 통합에 따른 새 통화 ‘유로’가 탄생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은행간 거래나 신용 카드 등 장부상의 통일 통화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2년 1월 1일부터 현금 통화가 유통되고, 7월 1일부터 마르크․프랑․리라 등 각국의 통화가 사라질 예정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유럽 전력에서 화폐가 수거되어 새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녹여질 예정이다. 경화가 될 금․은․동․니켈 등은 수천만 톤에 이르는 방대한 수요가 예상되고 있다.

 

 

19세기 초두에 유럽 전력의 국가 자산을 다 모아도 대항하지 못할 정도인 세계 최대의 로스차일드 재벌이 탄생하였다. 각국의 호전가(好戰家)들은 로스차일드 상회의 문을 두드려 빚을 져야만 했다.

 

 

금이나 은․동․니켈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한 가지 가정으로 단기적인 가격 급변이 생각된다. 그에 따라 주식시장도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금이나 은의 가격이 조금이라도 상승하면, 자금이 귀금속 투기로 흐르게 된다. 이를 계기로 월가의 과열된 주가가 단번에 폭락할 가능성이 생긴다.

주목할 것은 빌 게이츠가 1999년 9월에 캐나다의 은 채굴 회사의 주식을 10% 취득했고, 뒤이어 미국 제2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1999년 2월 전세계 생산량의 20%에 이르는 대량의 은을 구입한 일이다. 버핏의 투자 원칙은 “첫째 절대로 손실을 보지 말 것, 둘째 절대로 첫째 원칙을 잊지 말 것”이기 때문에 금 가격은 틀림없이 상승할 것이다.

2002년에 시행될 유로 화 유통 전에 갑자기 대량의 귀금속 수요가 늘어 가격이 폭등한다. 이것이 한 가지 예상되는 시나리오이다. 그 반대의 시나리오도 있다.

 

 

금 가격 상승은 주가 폭락의 신호이다. 이 경우 금괴는 투기가 아니기 때문에 서민이 지니고 있는 사소한 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월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1999년 3월 다우 평균 주가가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러한 상승은 전세계를 환류하고 있던 유산 상속인들의 자금이 국제 금융 마피아의 활동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뉴욕으로 많은 돈을 끌러 모은(훔친) 결과였다. 아시아 경제 위기 등으로 지구 전체가 소비를 억제해야 했던 세계적인 메커니즘에 기인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증권 거래소도 투자 의욕을 자극할 만큼 주가가 오를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갈 곳을 잃은 돈이 뉴욕에 계속 축적되어 주가가 오른 것이다.

컴퓨터․전자공학․통신 분야가 활성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투기성이 짙은 자금이 투입된 데 따른 상승률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과대 평가였다. 주가 상승으로 미국인의 ‘명목상 개인 소득’이 급상승하고 그 돈이 방대한 소비 증가로 흘러들어 물건이 잘 팔렸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소비가 수그러들면 곧바로 떨어질 생산성 향상에 불과했다.

월가가 순간치 1만 달러를 돌파했던 1999년 3월 16일 직후, 전세계의 경제 전문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지만, 그 원인을 미국의 국내 사정만 가지고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금융은 그렇게 성립된 것이 아니다. 미국인의 자산이 증가한다면, 외국으로부터의 자산유입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다.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ants)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배상 문제를 청산하기 위해 스위스 바젤에 설립된 조직이다. 현재는 전세계의 중앙은행 협동조합조직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대출은 자본의 8% 이내여야 한다”는 BIS 기준을 내세워 거품에 들떠 있던 일본 금융 기관을 단번에 지옥으로 내몬 국제 금융의 총본산이다. 1999년에는 12% 기준안을 제시하였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동 환율제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은 결코 안정적인 제도가 아니다. 순금을 화폐가치의 기준으로 하는 금본위제는 일찍이 1816년 영국이 채택하였다. 그 후 1900년에 미국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금본위제를 시작했으며, 각국의 중앙은행은 발행한 은행권의 약 1/3 내지 1/2에 상당할 만큼의 금괴를 준비해 항상 태환에 대비해 왔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과 동시에 주요국들에서 금본위제가 붕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누구나 ‘불안정한 지폐’를 ‘현물인 금’과 교환하려 한다. 따라서 전시에는 금본위제를 사실상 정지시켜 교환을 막고 중앙은행은 지폐를 많이 찍어 군사비를 창출해 군대를 강화함으로써 전쟁을 치른다. 이 지폐의 담보는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전이 끝난 1919년 미국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였고, 1925년에 영국이 복귀하였다가 다시 1931년에 폐지하는 등 많은 변천이 따랐다.

이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 12월 27일 발효된 IMF의 브레턴우즈 협정에서 ‘금이나 달러를 척도로 삼아 각국 통화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통화 교환 규칙이 정해졌다. 전후에는 전세계의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금 중에서 거의 70%에 가까운 방대한 양이 미국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달러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만큼 금이 모인 미국에서 금속 재벌들이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무역수지가 악화되자, 1971년 8월 15일 닉슨 쇼크를 계기로 변동 환율제로 이행한다. 이와 같이 환율제는 미국이나 영국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빈국의 예상을 뒤집고 180도 반전되는 불합리한 것임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1997년 태국의 통합인 바트(baht) 화가 폭락한 이래 한국에서 거의 200톤에 가까운 금괴가 스위스로 매각되었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가 매각한 대량의 금괴를 매입한 구매자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제 위기를 맞은 러시아도 1998년에 대량으로 금괴를 매각하였다. 1998년 브라질과 폴란드에서는 공적 보유 금이 2배로 급증했고, 캐나다․네덜란드․벨기에서는 공적 보유 금을 매각하였다. 도대체 그러한 금들은 어떤 이유로 어디에 얼마나 모여 있는 것일까? 그것들이 대량 확보된 단계에서 금 가격이 급등한다면, 단번에 금의 자산가치가 올라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록펠러 재벌의 스탠더드 석유

지금으로부터 130년쯤 전인 1870년에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라는 인물이 남동생 윌리엄(William), 프랭클린(Franklin)과 함께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 스탠더드 석유라는 정유회사를 창업하였다. 막내 동생 프랭클린은 중도에 목장 경영자가 되어 두 형과 다른 길을 걸었다.

존과 윌리엄 형제는 차례로 정유업자를 설득하여 담합 신디케이트를 조직하고 9년 뒤에 미국 전체 석유의 95%을 스탠더드 석유의 정유탱크 속에 틀어쥘 수 있었다. 남에게 단 5%만 남겨 주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독점이 아닐 수 없다.

그 수법은 이러하다. 창업한 지 불과 8년 뒤에 미국 전체의 정유액 3,500만 달러 가운데 3,300만 달러를 장악하고, 1882년 스탠더드 석유의 전 재산을 뉴욕에 집결하여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를 결성한 존 D. 록펠러는 일찍이 5대 부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로 인해 1890년 반트러스트 법이 제정되고, 1892년에는 그들의 아성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Standard Oil Co. of Ohio)의 해체가 명령되었다. 그러나 그는 뉴저지 스탠더드 석유(통칭 저지 스탠더드)를 트러스트의 아성으로 삼아 더욱 독점을 넓혀 나갔다.

 

 

드디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치하에서 이 거인도 34개 사로 분해될 운명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때 록펠러가 타격을 입기는커녕, 트러스트 해체라는 대사건으로 월가에서 이 회사의 규모가 재인식되어 사행심이 조장되면서 이전보다 더 투기열이 높아졌다. 오히려 작게 분할된 새로운 스탠더드 석유 주식 값이 30%나 치솟아, 록펠러 가는 가만히 앉아서 자산을 30%나 불리는 횡재를 만난 것이다. 트러스트 해체 2년 뒤인 1913년, 존 D. 록펠러의 자산이 9억 달러에 이른 것을 보면 그 사실은 자명해진다.

 

 

석유 제국을 이룩한 록펠러 자신은 뉴욕 주 포칸티코에 200만 달러 짜리 대저택을 세워 350명의 고용인을 고용하며 저택을 유지하는 데만도 연간 50만 달러를 썼다. 그밖에 3채의 거대한 저택을 소유했으며, 대부분의 자산을 형성한 1913년에 당시 총액이 9억 달러를 넘었다.

 

 

1812년 창업한 시티 은행은 1865년 내셔널시티 은행으로 개명하여 윌리엄 록펠러가 투자를 계속하면서, 1893년 스틸먼이 은행장으로 재임시에 뉴욕에서 1위로 올라섰고, 스탠더드 뱅크로 불리었다. 1909년에는 모건 상회가 대주주가 되어 1912년 JP 모건 주니어(통칭 잭)가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편 1863년에 창업된 뉴욕 퍼스트내셔널 은행(First National Bank of New York City)에서 1912년까지 은행장과 회장을 역임한 조지 F. 베이커(George F. Baker)는 ‘월가의 스핑크스’로 불리며 모건 상회의 철도 이권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지켰지만, 체이스내셔널 은행 5만주를 구입한 모건과 스틸먼의 친구였다. 그의 손녀 이디스는 월가의 로스차일드 계 대은행가인 제이콥 헨리 시프(Jacob Henry Schiff)의 손자와 결혼했으며, 이 은행의 대주주이자 임원을 맡은 이가 밴더빌트 일가의 페인 휘트니라는 식으로 얽혀 있었다.

이리하여 1955년에 앞에서 말한 내셔널시티 은행과 합병해 뉴욕 퍼스트내셔널시티 은행이 되었다. 1976년에 개명해 지금의 시티 은행이 탄생했으며, 이름 표기도 시티 은행(City Bank)에서 시티뱅크(Citibank)로 바뀌었다. 이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의 3대 재벌인 로스차일드․록펠러․모건이 합친 금융 기관임을 알 수 있다.

이 은행이 1998년에 자산 7,000억 달러(약 100조 엔)의 세계 최대 금융 기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트래블러스 그룹(Travelers Group)이 일본의 4대 증권사의 하나인 닛코 증권을 인수하여 1999년 4월 22일 일본에서 발족한 새로운 전국은행협회에 시티뱅크가 정회원으로 가맹한 것이다.

이에 비해 체이스 맨해턴 은행은 그 모체가 1799년 창업한 맨해턴 은행(Bank of the Manhattan Company)이다. 이에 거의 1세기 뒤늦게 시작한 체이스 내셔널 은행(Chase National Bank)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은행장과 회장을 역임한 윈슬럽 W. 올드리치(Winthrop W. Aldrich)가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처남이라는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록펠러 재벌의 금융기관이 되었다. 이 은행은 1955년 맨해턴 은행과 합병해 체이스 맨해턴 은행이 되었다.

록펠러 일가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원인이 미국의 엉터리 소득세법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원인 또한 명백하였다. 1909년 소득세 도입안에 대해 의회가 뜨거운 논쟁을 전개하는 바람에 법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소득세 도입에 가장 거세게 반대한 이는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이었던 백만장자 넬슨 W. 올드리치(Nelson W. Aldrich)였다. 그는 체이스 내셔널 은행장인 윈슬럽의 부친이었는데, 반대 이유는 그의 사위가 존 D. 록펠러 주니어였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민주당도 공화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가 최저 수천만 달러를 모금해야 하기 때문에, 정책으로 부호의 양해를 얻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양당 대립이 연출되고 국민이 총동원되는 큰 ‘파티’인 것이다. 그래서 정당을 영어로 ‘파티(party)’라 하는가보다.

 

 

미국에는 재벌당이라고 하는 하나의 정당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거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 문제 때문이다.

이미 이 사실은 많은 미국 언론인들이 지적하였다. 이 자금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금융 기관과 산업과 유산 상속인의 연줄로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록펠러 가의 경쟁자이자 협력자로서 같은 석유 재벌을 형성한 가문이 멜런 가였다. 걸프 석유를 창업하여 텍사스 주, 오클라호마 주 등 남부의 석유를 지배한 멜런 가는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이 스스로 금주법 시절 재무 장관에 취임했고, 외아들 폴 멜런(Paul Mellon)은 멜런 내셔널 은행(Mellon Naitonal Bank)의 임원이 되었다.

 

 

멜런은 솜씨를 발휘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0년에 걸쳐 하딩, 쿨리지(Calvin Coolidge), 후버의 3대에 걸친 공화당 내각에서 재무 장관을 맡으면서 “멜런 발치에 세 대통령을 거느렸다”는 평을 들었다.

 

 

멜런은 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예상대로 자신들 부유층의 자산이 보장될 수 있도록 즉각 세율을 낮추었다. 그 때문에 “멜런에게 재무 장관을 시키는 것은 카사노바에게 여학교 교장을 맡기는 것과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0년대 초에 세율은 세 번이나 인하되어 백만장자들에게 부과되는 최고 세율이 25%까지 제한되었고, 중산층은 거의 비과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뒤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세금을 줄이는 정책이니만큼 당연히 국가 재정이 어려워질 것으로 모두가 예상하였다. 그런데 거꾸로 세입이 증가하고 납세의 형평성이 향상되었다.

 

 

“세율을 올리면 세입이 증가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예로부터 이야기되었듯이 철도 승차율은 철도가 무엇을 운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최다 승객을 수송하면 최대 승차율이 되고 수입이 늘어난다. 정부 또한 이 사업 원리에 따라 달려야 한다”며 멜런은 의기양양하게 낮은 세율에 대해 설명하였다.

 

 

존 D. 록펠러와 같은 해인 1937년에 사망한 앤드류 멜런의 유산은 2억 달러(1998년 시가로 약 5조 엔)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실제 발표된 유산은 3,500만 달러였고, 그밖에 200만 달러의 부동산뿐이었다. 이는 7,500만 달러 이상을 아들과 딸들이 주식을 보유한 회사들에 미리 투자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래도 액수가 너무 적다. 멜런 가의 자산은 알코아나 걸프 석유 등의 주식만으로 1960년대에는 47억 달러에 이르렀고, 리처드․폴․사라․에일사 멜런이 각각 7억 달러를 가지고 있었으니, 상당한 액수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재벌은 대폭락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들 폴 멜런은 석유 남작이라 불리며 1999년 2월 세상을 뜨기 전까지 부친이 워싱턴에 설립한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 관장으로서 또 세계 제일의 미술품 수집가로서, 이 갤러리와 예일 대학에 각각 1억 달러 이상의 미술품을 기증하였다. 멜런이 경매에서 낙찰받았던 현란한 로마노프 가의 재물이 소장된 갤러리야말로 유산 상속세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랜드 사는 레밍턴 암스(Remington Arms Co.)가 전후에 해군업계의 스페리랜드(Sperry Rand Corp.)와 합병하여 레밍턴랜드(RemingtonRand Corp.)가 되어, 해군과 공군의 잠수함이나 미사일 방위의 두뇌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 사장을 지낸 이가 일본 점령군 총사령부(GHQ)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이다. 부사장에는 맨해턴 계획의 책임자로서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레슬리 그로브스(Lesile Richard Groves) 장군이 취임하였다. 이것이 조직 개편을 통해 랜드 코포레이션이 되어 펜타곤의 중추적인 두뇌 집단으로 활동하면서 록펠러 재벌의 지배를 받아왔다.

 

 

록히드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으로 유명한 대형 군수 산업체인 마틴마리에타 사(Martin Marietta Corp.)도 매수하여 록히드 마틴(Rockheed Martin Co.)으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록히드 마틴은 “북한 핵 미사일을 우주 공간에서 격추한다”는 선전 문구를 내세워 전역미사일방위구상(TMD)의 주력 제조업체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막대한 예산을 노렸다.

 

 

백악관과 정보 수집 군사 체제는 투자 은행의 화신이다.

CIA와 국방부의 입장에서는 현 정권이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에 따라 대외공작이 변해서는 안될 것이다. CIA 인사를 감독하는 재벌과 유산 상속인에게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위신이 흔들리는 일은 재산의 감소를 뜻하는 중대사이기 때문이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hel Rothschild)와 그 다섯 아들들의 지혜였다.

금융 제국의 기초를 세운 초대 마이어 암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1994년 2월 23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묘지에 일족 70여 명이 모였을 때, 당시 독일 총리였던 헬무르 콜(Hlemut Kohl)도 내방해 일족의 번영을 축하하였다. 바스티유 감옥을 뒤흔든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0년대에 마이어가 이미 거상으로서 한 재산을 이룬 시기부터 세어 보면 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밴더빌트 재벌의 두 배 가까운 세월이 흐른 셈인데, 그 기간의 투자와 금지를 계산하면 월가의 50년 간의 실적만 적용해도 당시 자산은 지금까지 600만 배로 증대된다.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게토(getto)에서 환전상을 경영하던 로스차일드 가의 마이어 암셸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본점을 장남이 이어받았고 차남이 빈(오스트리아), 3남이 런던(영국), 4남이 나폴리(이탈리아), 5남이 파리(프랑스)에서 로스차일드 상회를 열었다. 다섯 점포의 장부는 통일되었고, 자산과 이익 배당은 평등하게 이루어졌다.

나중에 일족 가운데 최대의 자산을 이루게 된 3남 네이선이 21세 때 2만 파운드를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에 거처를 정한 때가 1798년, 지금부터 200년 전이었다. 1800년 56세가 된 마이어 암셸은 자산이 10억 플로린(florin)에 이르렀다. 이 네덜란드 통화가 지금의 시가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태 상인 중 열 손가락 안에 든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독일 영주들에게 로스차일드 가가 신뢰할 수 있는 금융업자로서 자리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폐가 처음 생긴 것은 애초에 로스차일드 가와 같은 금 세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화를 맡아 보관하기 위한 훌륭한 금고를 가지고 있어서, 당시 영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금화․은화․동화 등 귀금속을 소유한 사람들은 전쟁 발발과 같은 특수 상황에 처하면 로스차일드 상회에 자기 재산을 맡기고 보관증을 받았다.

‘로스차일드 상회’라고 쓰인 보관증은 금화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금화처럼 무겁지 않았고 가벼운 종이로 충분히 교환가치가 있었다. 그 자체가 금화와 등가인 지불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지폐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에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된 시기는 로스차일드 가가 대두하기 1세기 전쯤이므로 지폐를 고안한 것이 로스차일드 가는 아니지만, 이 보증서 유통 메커니즘이 금본위제에서 지폐의 원형이라 생각할 수 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10년에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금융왕 베어링과 세를 다투고 1인자에 오른 이래 수년간 영국이 유럽 동맹국들에 제공한 자금인 4,200만 파운드의 절반을 자신이 조달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자가 되었다. 1812년에는 막내 동생 제임스가 파리에 정주하였고 부친 마이어 암셸이 68세로 사망하였다. 이 때 재벌의 시조로 추앙받던 그가 “우리 집의 자산은 일체 공표하지 말 것”이라는 유훈을 남겼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일가의 자산은 비밀에 싸여 있다.

 

 

1822년에는 5형제가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 받아 단번에 유럽 상류 사회의 정점에 올랐다. 그리고 빈 회의 의장을 지낸 메테르니히(Matternich, 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 등을 회유해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 모두가 로스차일드 상회에 의지하게 하였다. 유럽 전역의 왕실들은 로스차일드가에 염치없이 손을 벌렸다.

 

 

1875년이었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주식을 팔려는 것을 안 영국은 프랑스보다 선수를 쳐서 서둘러 구입하려 했지만, 잉글랜드은행으로부터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디즈레일리(Disraeli) 총리는 뉴코트에 있는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에게 급사를 보내어 “내일까지 400만 파운드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라이오넬이 담보가 무엇이냐고 묻자 “영국 정부”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바로 400만 파운드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7만 6000주를 매수해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입에 머금고 있던 청포도 씨를 뱉어내며 라이오넬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액을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400만 파운드라는 액수이다. 대영제국 역사상 최대 부호는 당시 디즈레일리 총리를 후원하며 여전히 건재했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으로, 그 자산은 아무리 많아도 500만 파운드 정도로 추정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19세기의 100년 동안 로스차일드 일족이 획득한 부는 4억 파운드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로스차일드 일족이 빅토리아 여왕보다 수십 배의 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 주식마저도 청포도 씨나 다름없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유산의 크기를 재는 한 사건이 1949년 6월 30일 파리 증권 거래소에서 일어났다. 이 날 아무 이유 없이 리오틴징크․로열더치셸(Royal Dutch/Shell Group)․르니켈(Le Nickel)․드비어스 4대 종목이 일제히 크게 폭락하였다. 원인은 기 로스차일드의 부친 에두아르가 81세로 사망한 데 있었다. 프랑스은행 이사를 지내고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주였던 에두아르는 고령으로 사업과 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과 주가는 유산 상속인에게 중대한 이해 관계가 있었다. 유산 상속세 가운데 에두아르가 보유하던 주식에 대한 과세는 사망 시의 증권 시가로 산정되기 때문이었다. 4대 종목은 로스차일드 주였는데, 일족이 보유 주식의 시가를 폭락시킴으로써 유산 상속세를 대폭 줄인 것이다.

 

 

미국 재벌의 역사를 생각할 때, 밴더빌트는 네덜란드 계, 듀퐁은 프랑스 계, 록펠러는 독일 계이다. 그러나 미국 산업계를 형성한 주인공의 대부분은 모건․카네기․포드 등 대영제국의 자손에서 탄생하였다. 대영제국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이탈리아의 메디치(Medici)가를 유럽 금융 재벌의 시조로 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 동인도회사, 로이드 보험(Loyds Insurance), 잉글랜드은행, 베어링 상회가 탄생함으로써 근대적인 금융가가 런던 ‘시티지구’에 확립되었다.

베어링 가와 로스차일드 가의 런던 시티가 뉴욕 월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의 호텔와 애스터 가가 영국에서 작위를 수여받고, 미국에서 재산을 이룬 석유왕 게티(J. Paul Getty) 일족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국적을 옮기는 등 상류 계급에서는 끊임없는 이동이 이어지고 있다.

 

 

베어링 재벌은 1763년 베어링 상회가 설립된 이래 로스차일드 가가 대두하기까지 런던 금융계를 지배했으며, 이후에도 양가가 세를 다투어왔다. 베어링 상회는 1995년 젊은 딜러가 거액의 손실을 내어 도산하고 네덜란드의 ING뱅크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이미 과거의 존재로 잊혀졌지만, 그렇다고 베어링 일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100년쯤 전인 1890년 가을에도 발생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경쟁자인 로스차일드 은행이 비밀리에 구제 자금을 마련해 베어링 상회를 궁지에서 구출했고, 그 이전인 1839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의 위기를 구한 것이 베어링 상회였다.

 

 

18세기에 동인도회사 회장으로서 세계 무역에 군림하고 대영제국의 이권을 7개의 바다로 확장한 ‘유럽 제일의 상인’ 프랜시스 베어링의 자손들은 영국 귀족의 중심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월가의 대표적인 투기꾼으로 이름을 남긴 이가 제이 굴드(Jay Gould)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견실하게 사업 투자로 일관하면서 금융재벌을 형성해, 미국 전체 산업과 국가를 지배한 투자가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한 세기 전인 1892년에 제이 굴드는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에도 ‘월가의 악마’라는 악명이 전해지며 그 투기 전설이 미국 경제지에 종종 인용되는 까닭은 요즘의 기업 탈취꾼의 수법이 굴드가 이용한 악질적인 수법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헤리티지」가 미국의 모든 부호 목록을 만들었을 때 역대 9위에 기록된 굴드의 개인 자산은 1998년 시가로 환산해 421억 달러(5조 엔)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 ‘지명 수배자’이던 깡패 제임스 피스크(James Fisk)를 동업자로 삼고, 도둑 귀족의 대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에게 도전해, 5대호 주변의 에리 철도(Erie Railroad)를 빼앗았다. 후에 밴더빌트에게 관권을 이용하는 방법을 일러 주어 손잡았고, 검은 돈을 건네 주며 차례로 주주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축재뿐만 아니라 눈감으면 코 베어가듯이 태연스럽게 약한 동료들을 배신하고, 뇌물로 뉴욕 판사를 포섭해 악법을 제정하게 해 인수 사건들에서 상대방을 물리쳤다. 심지어는 경쟁 회사에 밀고 들어가 주식 대장을 훔치기까지 했다.

굴드의 검은 돈에 엉겨 붙는 이들 또한 배후 동정을 계속 그에게 귀띔해 주고 제 몫을 챙겼기 때문에 한때는 굴드 일파가 휘두르는 권력이 ‘미국의 법’이 되었다. 이들은 철도 회사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기관차를 탈선시키기까지 하였다.

에리 철도에서 굴드의 배임 소동이 일어난 1869년에는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Grant, Ulysses Simpson) 장군이 대통령에 재임 중이었다. 굴드는 대통령에게조차 “금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며 일갈하고, 금 부족 사태를 연출해 금 가격을 끌어올린 다음 재빨리 팔아치워 ‘검은 금요일’로 불리는 대폭락을 일으켰다.

갖은 사건을 일으켜 에리 철도에서 쫓겨나자, 그는 서부로 가 주식매점에 착수하였다. 유니온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의 임원이 되자 거금을 여기저기 굴리면서 남서부 철도주를 사들여, 일대의 철도 가운데 약 절반을 장악하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인 조지 제이 굴드(George Jay Gould)가 사업을 이어받아 미국 횡단 철도를 둘러싸고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arriman)과 가공할 경쟁을 전개하였다. 굴드는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만년을 맞이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투기꾼의 활동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굴드가 뉴욕 시의 악덕 판사를 이용해 에리 철도의 관련 회사를 빼앗았을 때, 그에 대항하는 판사와 총명한 변호사들을 이끌고 교묘히 굴드에게 덫을 씌우면서 그 철도 회사 부사장에 취임해 폭력단 무리를 내쫓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 인물이 바로 JP 모건으로 이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런던에서 금융왕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세상을 떠난 1836년 7월 28일에서 불과 9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837년 4월 17일, 그 환생이라고도 할 금융왕이 태어난 것이다.

옛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철도는 철로의 이름을 빌려 쓴 금융 자본 - 거대한 상업 은행이었다. 20세기 초두에 철도 개척 시대가 끝나가던 때, 미국 전체 증권 발행액이 철도를 10이라고 할 때 여타 모든 산업의 합계가 5도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기업이 철도 자본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1925년 무렵 모건 상회가 지배한 주요 15개 철도의 자산은 합계 85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 금액은 1998년 시가로 7,31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금액으로 오늘날의 거대 헤지펀드도 발 끝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의 철도회사 산하에 각기 수십 개의 산업회사가 문어발처럼 꿈틀거리며, 미국 내 발행 주 중 47%가 철도 회사 소유이고 총 1,000개를 넘는 기업들이 모건 상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모건 상회의 자산 총액은 여러 역사가들이 계산을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밝힐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1913년 사망한 JP 모건의 유산은 놀라울 만큼 적었다고 모든 기록에 쓰여져 있다. 미술품 수집 1억 달러, 부동산 7,000만 달러, 기타 현금이나 신탁기금 등의 유산이 합계 3,000만 달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음의 상인 듀퐁, 철도왕 밴더빌트,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곡물왕 카길(Cargil), 담배왕 듀크, 광산왕 구겐하임, 석유왕 멜런, 자동차왕 포드 등은 비록 악랄한 트러스트를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대중을 상대로 상품을 판매하는 산업가였다.

 

 

JP 모건이 국제 금융업자로 성장한 역사는 세계적 금융가였던 미국인 조지 피보디(George Peabody)가 런던 금융계에서 대활약하던 시대인 1854년에 JP 모건의 부친인 주니어스 모건을 영입한 날에 시작되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키더피보디(Kidder Peabody) 증권의 일족이 창업한 조지 피보디 상회(George Peabody & Co.)는 당시 영국 제일의 미국 금융 기관 대표였다. 빅토리아 여왕을 배알한 피보디가 사망한 뒤 주니어스 모건 상회(Junius Morgan & Co.)로 바뀌어 로스차일드 상회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투자 은행 모건 그렌펠이다.

 

 

“그 분야의 1위나 적어도 2위가 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수 없다. 3위 이하는 소용없다”

웰치의 이 말은 20세기 초두에 JP 모건이 한 말 그대로이다. 웰치는 키더 피보디 인수로 금융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하고 나서 항공기 대여 회사 GPA 그룹과 방송계의 거인 NBC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보석상 티파니(Tiffany)의 첫째 주주가 되더니,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카르텔과 공모해 다이아몬드의 국제 시장 가격을 조작하였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에 FBI가 조사에 나설 정도였다.

 

 

1843년 조지 피보디 상회(런던) 설립 → 1854년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 파트너가 됨 → 1864년 개편해 JS 모건 상회(런던) → 1900년 로스차일드 일족의 에드워드 그렌펠이 지배인이 됨 → 1910년 개편해 모건 그렌펠

 

 

1861년 JP 모건 상회 설립(뉴욕)

 

 

JP 모건이 투기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유명한 사건은 금본위제가 공포되기 전인 1893~1895년에 걸쳐 일어났다.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 시절에 경제 위기가 닥쳐, 금과 은의 빈번한 교환 때문에 재무부의 보유 금이 바닥나면서, 국가 비상 사태가 야기되었다. 이 때 어거스트 벨몬트와 런던 로스차일드 가가 움직여, JP 모건이 백악관을 직접 찾았다. 그리하여 각료들에게 지시가 내려지고, 삼자 제휴 플레이를 통해 금을 동원함으로써 미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마저 조종하게 된 JP 모건 부자는 증권 투자를 독점, 금융 트러스트를 형성하였다. 당시 록펠러의 석유 트러스트를 따라서 담배 트러스트․소금 트러스트․설탕 트러스트․술 트러스트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와중에서 JP 모건은 트러스트의 트러스트라 불린 모건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미 1892년에 발명왕 에디슨을 농락해 GE를 설립하고 전기 사업에 진출했던 모건은 1901년에 철강왕 카네기를 매수해 철강 트러스트라 불리는 US스틸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는 미국 전역의 전화를 독점하는 AT&T 인수를 마쳤으며, 1920년에는 죽음의 상인 듀퐁과 손잡고 GM을 지배하였다.

“기원전 4004년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서기 1901년이 되어 JP 모건과 존 D. 록펠러가 지구를 바꾸어 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다우 산업주 30종 가운데 모건 주로는 GE․GM․듀퐁․텍사코․US스탈(현재 USX)․AT&T․IBM․JP 모건․시티뱅크를 꼽을 수 있다.

 

 

이렇게 다소 오래된 이야기에 조바심이 나은 이유는, 우리가 살아온 1980~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대형 은행과 증권 회사의 합병 바람이 거세게 불었기 때문이다. 체이스 맨해턴 은행, 케미컬 은행,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Manufacturers Hanover Trust), 도이치 은행, 뱅커스 트러스트, 드레스덴 은행(Dresdener Bank), 스위스 은행, 스위스유니온 은행, 트래블러스, 시티뱅크, 메릴린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Bank of America), 시큐러티퍼시픽(Securities Pacific), 홍콩 상하이 은행(Hongkong & Shanghai Banking Corp.), 미들랜드 은행(Midland Bank) 등 무수히 많은 합병을 목도한 바 있다. 모건 전성기인 1919~1928년 사이에도 그와 비슷한 은행 합병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친 바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 10년 동안에 놀랍게도 1,358개 은행이 합병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었다.

 

 

이듬해인 1930년 체이스가 미국 1위가 되기까지 4,000개 은행이 도산해야 했다.

 

 

지금까지 등장한 밴더빌트․카네기․포드․록펠러에게는 “별다른 자금도 없었으면서 막대한 재산을 이룩하였다”는 ‘미담’이 있는데 비해, JP 모건은 애초부터 자산가였다. 즉 미국 상류 사회의 정통파였다는 데 그 해답이 있다.

 

 

영국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산업혁명의 기계화와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 발명 및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의 증기 기관차 발명에 의한 철도의 발달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의학․시계 세공․문화 예술․철강․화학․약품․통신․항공 산업 등이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하였다. 미국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로버트 풀턴(Rovert Fulton)에 의해 증기선이 발명된 뒤에 철도․철강․석유․화학․통신․전기․할리우드 영화․자동차․텔레비전․컴퓨터․항공기․우주개발․인터넷을 육성해 어느 시대에나 대재벌과 억만장자를 배출하였다. 산업은 모든 것의 어머니이다.

일본이 번영하던 시대에는 모든 산업 기술에서 미국을 추격하여 소형화와 개량이라는 편의를 제공하며 세계를 석권하였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컴퓨터 서비스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 쓰러져 가던 미국 금융계를 부활시킨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면적만 넓은 나라가 아니다. 잇따라 새로운 것을 세계에 제공할 공업력과 독창성에서 19세기 말 이래 한결같이 최고의 자리를 지켜 온 나라이다. 미국 경제가 전락하던 시대에는 반드시 기술 정체 상태가 관찰되었다. 한편 산업계의 배후에 늘 군사력이 있어서 국가를 지치게 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것도 미국의 특징이다.

따라서 투기꾼은 가난한 나라에는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다. 빌 게이츠 등 산업가가 있고서야 비로소 조지 소로스가 월가에서 활약할 수 있다.

 

 

또한 1991년 영국의 신문왕 로버트 맥스웰(Robert Maxwell)이 배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뒤에 막대한 채무와 자금 유용이 드러났는데, 그 금융 범죄에 관여한 회사가 골드먼 삭스였다.

사실 1986년에 골드먼 삭스는 스미토로(佳友) 은행으로 하여금 자사주 3,900만 주를 보유하도록 투자를 강요해 1,000억 엔 가까이 자금을 주입시키고는 경영에는 일체 간섭하지 못하도록 한 바 있었다.

 

 

절대로 손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1998 8월~9월에 걸쳐 헤지펀드 LTCM이 러시아 금융 붕괴의 영향을 받아 40억 달러의 손실을 내가 파산해, 일시적으로 월가에 대폭락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월가와 백악관이 나서 LTCM은 곧바로 구제되었다.

 

 

만주철도 이권을 노렸던 인물로서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해리먼은 유니온퍼시픽 철도를 키워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최대의 철도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에서 폴 뉴먼(Paul Newman)과 로버트 레드퍼드(Robert Redford)가 연기한 열차 강도 부치 캐시디(Butch Cassidy)와 선댄스 키드(the Sundance Kid)가 유니온퍼시픽 철도를 습격한다. 이 철도 강도들을 남미 볼리비아로 추방한 미국 최초의 철도왕이 해리먼이었다. 1909년 사망 당시의 유산이 1억 달러라고 하니, 1998년 시가로 3조 엔 가까이 된다.

그가 지배한 철도 길이가 30,000km, 보유하던 기선의 항해 거리는 90,000km를 넘었다. 사생활에서는 뉴욕의 50실의 아파트, 교외에 150실의 별장 등을 소유하고, 정계에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철도왕이 바로 해리먼이었다. 투기꾼 제이 굴드와 경쟁하고, 금융왕 JP 모건과는 평생 반목을 거듭하였다.

 

 

1946년부터 영국 대사, 그리고 1946~1948년 트루먼 정권의 상무 장관이 되어, 상무 차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휘트니를 부하로 두었다. 패전 후 일본에서 점령군이 활보한 시절을 19세기 2대 철도왕의 유산 상속인이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 그가 사망하고부터 8년이 지난 1994년 9월, 유산 6,500만 달러를 남긴 애버럴 해리먼의 유족 4명이 “미망인 파멜라는 1,860만 달러의 4개 신탁기금을 제멋대로 이용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투자 등에 수백만 달러를 불법 운용하고 있다”고 항의해, 반환하도록 버지니아 주 재판소에 고소하였다.

 

 

파멜라 딕비의 첫 남편은 영국 처칠 총리의 아들 랜돌프 처칠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처칠 총리의 관저가 있던 다우닝 가 10번지에 살고 있었다. 밴더빌트 가의 근친이었고, 그녀의 부친은 영국의 에드워드 딕비(Edward Digby) 남작이다. 모친은 한나 로스차일드, 사촌 오빠가 앨버트 프림로즈(Albert Primrose)였다.

 

 

역사책에는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황태자비 조피(Sophie) 부처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방아쇠가 당겨졌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6년 전인 1908년에 오스만투르크의 쇠퇴를 틈타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강제로 합병했기 때문에 슬라브 민족주의의 세르비아가 격분하고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했던 것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었다. 그 후 1912년~1913년에 걸쳐 발칸 전쟁이 전개된 당연한 결과로서 황태자가 암살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자는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으로 조종되는 유럽 대제국 합스부르크 가였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토와 항로의 권익 확보에 노골적으로 욕심을 보인 여러 나라들이 일제히 참전하였다. 8월 1일에는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하고, 영국 해군 장관이던 처칠이 함대 동원을 명령, 4일에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해 전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영토로서 중요한 곳은 당시 세계 최대의 바쿠 유전 루트의 열쇠를 쥔 터키였다. 11월 5일, 영국이 터키에 선전 포고했고 처칠의 전략에 기초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비너스)가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터키 남동부 앞 바다의 섬 키프로스 합병을 선언하였다. 처칠은 중근동 지배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바쿠 → 아제르바이잔 → 그루지야 → 흑해 → 보스포루스 해협 → 다르다넬스 해협 → 에게 해 → 유럽의 석유 루트를 장악했던 나라가 불가리아․터키․그리스였고, 그 서쪽에 이웃한 곳이 세르비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였다.

이듬해인 1915년 2월 19일에는 영국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기뢰에 패퇴하여 전쟁이 확대된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254만 명의 사상장를 내고 무참히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방대한 수의 사상자를 낸 데 대한 가장 큰 책임자는 강행군을 주장한 작전 사령관 처칠이었다. 처칠의 의도는 연합국 측에 속한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대를 군사적으로 지배해 영토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영국 정계에서는 “독일인보다 위험한 사나이가 처칠”이라고까지 얘기되었었다.

 

 

예로부터 어느 나라에서나 ‘관리들은 게으르다’고 비판받곤 했지만, 예외인 곳이 있다. 세무서만은 밤늦게까지 봉급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 세무서 직원의 근면성 덕분에 누구나 골치를 앓는다.

 

 

담배왕 제임스 듀크(James B. Duke)의 딸 도리스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소녀’라는 별명을 간판 삼아, 여러 남자를 거쳐가며 80세로 수명을 다하였다. 먼저 담배왕의 활동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통칭 백 듀크(back Duke)로 불린 제임스 듀크는 담배 종이 마는 기계 발명자를 거느리고 담배업계에서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19세기 말에 록펠러가 석유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수법을 보고는 담배업계도 트러스트를 결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884년 뉴욕에 경쟁 업자인 4대 담배 제조업자를 모으더니 “경쟁을 그만두고 가격을 끌어올려 왕창 벌자”며 담합하였고, 1890년에는 5개 사를 합병해 아메리칸 바코(American Tobacco)를 설립하였다.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자 담배왕은 독점과 인수를 한층 강화해 해외로 진출, 영국의 임페리얼터바코(Imperial Tobacco)와 합병해 브리티시아메리칸터바코(British American Tobacco)를 설립하였다. 전 자산의 2/3를 아메리칸 터바코가 보유하고 스스로 회장을 맡아 세계에 군림하였다. 그런데 아시아 진출에 따른 폭리가 원인이 되어 각지에서 독점에 반대하는 노동자 시위가 일어나, 셔먼 반트러스트 법(Sherman Anti-Trust Law) 위반으로 1911년 트러스트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와 마찬가지로 14개 사로 분리되고 브리티시아메리칸터바코가 영국 자본으로 바뀌어도 듀크는 여전히 모든 새 회사의 대주주 자리를 지켰다. 뉴저지에 32만 평의 대저택을 세웠고, 1912년에는 세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뉴욕 78번지에 보르도에 있는 라보띠에르 성(Chateau Labotiere)을 모방한 300만 달러 짜리 대저택을 지었다. 딸 도리스 듀크는 그 해 태어났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미국 어린이 부자 등급’에서 도리스가 1억 달러, 윌리엄 밴더빌트의 아들이 6,000만 달러, 존 제이콥 애스터가 300만 달러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밴더빌트 가와 애스터 가에는 상속인이 많았지만 도리스는 외동딸이라서 두드러지게 많은 액수를 기록했던 것이다. 미국인 평균 소득이 343달러이던 시절에 1억 달러(1998년 시가로 2조 4,360억 엔)를 소유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30만년 동안 일해야 버는 돈을 아기가 소유한 것이다. 그녀는 커서 10만 달러나 나가는 금제 식기로 식사를 하고, 대리석 욕조에 수도꼭지는 금제인 호화 생활을 하게 된다.

1925년에 제임스가 세상을 떠나자, 13살의 도리스가 받은 유산은 3억 달러였다. 이 날부터 도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돈인 많은 소녀’로 불리게 되었다.

 

 

듀크 가는 당시 대통령․부통령․법무 장관․금괴업자(뉴몬트마이닝 창업자)․모건 상회 간부 등 폭넓은 규벌을 형성해 당국으로부터 추궁 받지 않을 위치에 있었다.

 

 

맥아더 원수의 부친 아서(Arthur)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필리핀을 소탕하고 최초의 필리핀 군사총독이 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훗날에 아들 맥아더가 일본군을 물리쳤을 때, “나는 돌아왔다”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필리핀 지배자로 복귀한 것이다.

 

 

더지 자동차의 창업자 더지 형제는 1903년에 포드 자동차에 투자해, 1925년에 딜러리드가 더지 형제의 유산 상속인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했을 때 현금으로 1억 4,600만 달러(1998년 시가로 1조 5,000억 엔)를 지불한 일로 유명한 큰 자산가였다.

 

 

JP 모건이 사망한 반년 뒤에 개인소득세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부동산왕 애스터, 철도왕 밴더빌트, 죽음의 상인 듀퐁, 곡물왕 카길,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금융왕 모건, 석유왕 록펠러, 담배왕 듀크, 광산왕 구겐하임, 석유왕 멜런 등의 재벌이 모두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과세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1959년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혁명으로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로 바뀐 뒤 1961년에 재벌의 당주 이레네 듀퐁의 재산이 쿠바 정부에 압류되는 등 자산 은닉처가 위기에 빠졌다. 이 때 미국의 부호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20세기 말까지 미국이 지나칠 정도의 적개심을 보이며 쿠바에 경제 제재를 계속해 온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홍콩상하이 은행은 로스차일드 가의 ‘아편왕’ 일족, 아서 사순(Arthur Sasson)이 창업했기 때문에 사순 일족의 로런스 카두리(Lawrence Kadoorie)가 홍콩 경제를 장악하였다. 1993년 로런스가 사망하자 아들 마이클이 승계해, 1997년 홍콩 반환과 동시에 초대 홍콩 행정 장관으로 둥젠화(董建華)를 배출하였다.

이 사순 재벌의 세력이 초기에는 아편 산업과, 이후에는 담배 산업과 결합해, 전세계 밀무역에 깊이 관여하여 택스헤이븐의 루트를 구축하게 되었다. 담배왕 제임스 듀크 이후, 담배 ts업은 RJ 레이놀스(RJ Raynolds)에 고배를 마신 아메리칸터바코가 아메리칸브런즈(American Bronze)로 개명해 영국에 남은 브리티시아메리칸터바코(BAT)에 담배 부문을 매각해야 했다. BAT는 순 영국 자본으로서 필립모리스(Philip Morris Companies Inc) 다음 가는 담배 제조 회사가 되어, 1999년 1월에 네덜란드의 로스만인터내셔널(Rosman International, 로스차일드 재벌)과의 합병을 발표했으며 세계 1위 자리를 다투고 있다.

 

 

국민 소득을 구하기 위해서는 국민총생산(GNP)을 인구수로 나누면 되지만, 최근의 통계는 외국인의 노동을 국력에 포함시킨 국내총생산(GDP)으로 산출되고 있다. GDP에 대한 GNP의 최근 비율은 외국기업의 현지 생산이 많은 미국에서는 0.94인데 비해, 자국의 기업이 해외에 대량 진출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1.01이다.

 

 

스위스가 유럽 통화 통일에도 참가하지 않은 것은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유로 화의 가치가 정해지기 전에 스위스 프랑화의 교환 가치가 변하는 것을, 비밀 계좌를 가진 국제적 자산가들이 꺼렸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Lenin, Vladimir Ilich)이 스위스를 거점으로 활동하였고, 소련 당시에는 동서 무역의 지불 창구가 중립국 스위스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전후에 국제 금융 마피아의 본거지인 BIS(국제결제은행, 별칭 바젤 클럽)가 소련의 금괴를 접수하는 창구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지난 70년에 걸쳐 공산당의 자금이 운반된 루트를 알고 있는 관료들이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신흥 재벌로 거듭난 인맥-별칭 모스크바 마피아-이 되었다.

러시아 기업의 다수가 자금을 해외 은행에 맡겼는데, 은행 계좌의 대부분이 스위스 취리히나 제네바에 있었다. 산업계의 대표 빅토르 체르노미딘(Viktor Chernomyrdin) 총리나 공산당의 대표 예프게니 프리마코프(Evgenii Primakov) 총리도 이들 러시아의 신흥 재벌을 택스헤이븐으로 이끌어 왔다.

옐친 대통령의 차녀 타치아나(Tatiana Yeltsin)를 농락해 에어로플로트 항공(Aeroflot Russian Int'l Airlines)의 자금을 유용한 CIS(독립국연합) 사무국장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oris Berezovskii)도 공산당 관료를 비판하면서 그 자신이 스위스를 통해 돈세탁에 정신을 팔았다. 그 결과 1,500억 달러(18조 엔)라는 거대한 대외 채무를 지게 된 러시아는 1998년 말까지 상환 유예를 선언한 모라토리엄(moratorium)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채무 금액은 해외로 도피한 외화 액수와 거의 같다.

 

 

카길은 전세계의 농지를 지배하고 있지만, 가족이 경영하는 일족 회사이기 때문에 증권 거래소에 상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식이 비공개인 까닭에 자금의 흐름이 완전한 비밀에 싸여 있다.

카길은 밀을 중심으로 한 곡물 상사로서 1865년에 창업되었다. 1990년대의 카길은 완전히 종합 식품 상사로 변모해 예전의 동인도회사와 비슷한 성격을 띠며, 영국의 PO기선 및 자댕매서슨처럼 해운업에서 금융업으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카길은 1997년 도산한 야마이치(山一) 증권의 자회사 야마이치 파이낸스와 식품 전문 회사 도쇼쿠(東食)를 인수하였다. 1998년 5월, 카길의 전세계 매출액은 500억 달러(6조 엔)를 넘었다. 유통 루트를 장악해 본격적인 일본 시장 진출을 꾀했지만, 일본에서의 매출액은 아직 4%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카길 본사가 노리는 목표 달성은 이제부터이다.

카길 사업의 특징은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 65개국에 연결망을 잇고 컴퓨터로 기후 변동과 곡물 수확량을 추적하는데, 그 배후에 CIA의 조사 활동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사업 내용을 비밀에 부치는 것은 8만 명의 종업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악관의 국책으로서 필요한 조치이기도 하다. 다음에 서술되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전체 상을 파악할 수 있다.

카길에 자본을 제공한 체이스맨해턴 은행의 CIA 커넥션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이 은행의 회장을 지내고 지미 카터를 대통령으로 밀어준 이래 꽤 뚜렷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자본은 다른 한편에서 CIA 위원회를 조직한 형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미망인 마가레타 머리(Margaretta Murphy)가 1970년대 소련으로 곡물을 대량 수출한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Daniels-Midland Co., ADM) 임원이 되어 산하에 버드와이저(Budwiser)와 패권을 다투는 쿠어스(Coors) 맥주의 자회사인 쿠어스 식품까지도 소유하는 메커니즘으로 성장하였다. 그 ADM 회장 드웨인 안드레아스(Dwayne O. Andreas)가 카길의 전 부사장이기도 하였다.

록펠러 재단이 ‘녹색 혁명’으로 불리는 밀 개량의 성과를 올리고 카길이나 ADM과 공동으로 아시아 전역의 농지를 지배하게 된 것은, 초대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딸이 미국의 농경기계를 지배한 발명가 사이러스 맥코믹(Cyrus H. McCormick)의 아들과 결혼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International Harverster, 현재 나비스타인터내셔널 Navistar International)라는 곡물 제국의 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 식품 무역 상사와 연결되는 것이 소매업계이다. 소매 연쇄점 월마트(Wal-Mart)의 창업자 샘 월튼(Samuel M. Walton)은 1992년에 사망하기까지 미국 제일의 부자로서 오늘날의 빌 게이츠와 같은 존재였고, 그 자산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유족인 월튼 가는 1998년 「포브스」에서 억만장자 목록의 6위부터 10위까지 차지했고, 그밖에 두 사람의 가족도 목록에 올랐다. 도합 7명의 월튼 가족의 자산을 합하면 570억 달러(6조 8,400억 엔)에 이르러, 빌 게이츠의 584억 달러와 맞먹는 대부호인 것이다. 다만 여러 명의 가족으로 자산을 나누었느냐 혼자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칸소 주에 있는 월마트 본사에는 주지사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소문난 변호사가 임원을 맞고 있었다. 그녀 뒤에는 역시 아칸소 주가 배출한 식품 회사로서 미국 제일의 치킨업자인 타이슨 후즈(Tyson Foods)도 있었다. 업계에서 타이슨이 미국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사업을 미국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카길의 곡물 사료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식품 회사를 매입해 치킨 붐을 타고 아칸소에서 시카고 거래소로 가는 치킨 수송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체이스’가 자금을 제공하고, ‘나비스타’가 농기계를 농민에게 팔자, 소매 체인점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서 판매하는 일련의 콘체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의 아칸소 주지사가 윈슬럽 록펠러, 후계자가 빌 클린턴, 현재 부지사가 윈슬럽 록펠러 주니어이다.

 

 

스탠더드 석유와 아메리칸터바코의 간부인 올리버 페인의 여동생과 결혼한 윌리엄 휘트니는 뉴욕 시가철도 등의 유산으로 막대한 수입을 받았다. 그는 저택을 지을 때, 로마 도리아 궁에서 청동으로 만든 문을, 이탈리아 각지의 고대 궁전 터에서 대리석을, 유럽의 저명한 가옥에서 천장을 그대로 운반하는 사치의 극을 달렸다. 그의 소유지로는 뉴욕 시가지에 있는 대저택 외에도 롱아일랜드에 5,000 에이커, 매사추세츠에 700에이커, 뉴욕에 16,000에이커 켄터키에 3,000에이커의 농장,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수렵장과 경마장이 있는 2,000에이커의 저택, 또 뉴욕에 면적을 알 수 없는 광대한 농장 등이 있다. 여기에 든 것만으로도 3,273만 평이다. 게다가 본인은 해군 장관으로서 침략에 몰두하며 쿠바 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출처: http://blog.daum.net/aspire7/843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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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의 역사

경제흐름 2013.06.30 10:58

미국 경제의 역사
미국 경제의 뿌리는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경제적 안정을 찾아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대륙은 처음엔 가까스로 수지가 맞는 식민지경제에서 소규모의 독립적인 농업경제로, 나중에는 매우 복잡한 산업경제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경제적 진화에 발맞추어 미국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면서도 정부의 개입 정도는 점점 더 커졌다.


북아메리카의 첫번째 주민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베링 해협이 있는 아시아에서 육로를 통해 2만 년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유럽 탐험가들은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곳이 인도인 줄로만 알고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이 토착 종족들은 소수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어떤 경우엔 다른 부족과 연합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물물교환을 했고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전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도 말이다. 원주민들이 발달시켰던 경제 시스템은 그곳에 정착한 유럽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국을 가장 먼저 ‘발견’한 유럽인은 바이킹이었다. 그러나 1,000년경에 일어난 그 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회는 대부분 농업과 지주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아직 상업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터라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거나 정착할 만한 동기를 갖지 못했다.

1942년 이탈리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깃발을 배에 꽂고 아시아로 가기 위해 남서쪽 항로를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그후 100년 동안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신대륙의 황금과 부, 명예와 영광을 찾아 유럽 대륙에서 건너왔다.

그러나 초기 개척자들은 북아메리카의 황무지에서 영광도 금도 찾지 못했으며, 대부분 정착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북미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1607년에 한 무리의 영국인들이 훗날 미국의 모태가 된 최초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제임스타운이라고 부르는 정착촌은 오늘날의 버지니아에 위치한다.


식민지 건설

초기의 정착민들은 다양한 이유로 신대륙에 건너왔다. 매사추세츠의 최초 이주자들은 신앙심이 두텁고 자기절제가 강한 영국인들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버지니아를 비롯해 다른 이주민촌의 사람들은 주로 사업적인 모험을 위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자유와 부, 이 모두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영국인들이 정착에 성공하여 나중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특허회사(charter company)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특허회사는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영국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주주들(보통 상인과 부유한 지주들이었다)이 세운 회사였다. 왕은 그들이 회사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조달할 때 경제적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적렌濚萱?권위도 허가하거나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생각만큼 수익을 거두지 못하자 영국 투자가들은 식민지개발 허가증을 정착민들한테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비록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어쨌든 식민주의자들은 그곳에 남았고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의 마을과, 자신들의 경제를 일궈나갔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

초기 식민지의 번영은 모피 가공 무역 덕분이었다. 수산업도 매사추세츠가 부를 축적하게 된 일차적인 원천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전체로 보면 주로 소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생활했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했다. 몇몇 소도시나 북캘리포니아, 남캘리포니아, 버지니아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담배나 쌀, 인디고(푸른색 염료)를 수출하고 생필품이나 사치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식민지가 성장하면서 보조적인 산업도 발달했다. 전문적인 제재소와 제분소도 여럿 등장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고기잡이 배, 그리고 나중엔 교역용 배도 만들기 위해 조선소를 세웠다. 또한 소규모 제련소도 설립했다. 18세기까지 지역마다 발전의 패턴을 달리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조선을 주업으로 하고 항해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메릴랜드나 버지니아,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농장(많은 농장이 노예를 이용했다)에서는 담배와 쌀, 인디고 농사를 했다.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같은 중부의 식민지는 곡물과 모피를 배로 수출했다. 노예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점차로 나아졌다. 사실은 영국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생활수준이 높았다. 영국인 투자가들이 철수했기 때문에 식민지는 이주민들 중에서 기업가들에게 개방되었다.

1770년경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제임스 1세(1603~1625) 이후 영국의 정가를 뒤흔들었던 자치정부 운동에 동조할 만큼 정치적럭姸╂岵막?준비되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세금과 여타 문제를 두고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영국이 정한 세율과 법규를 자신들의 뜻대로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와의 분쟁이 격화되자 어떤 사람들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 식민지가 독립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의 정치적 혼란과 마찬가지로 미국혁명(1775~1783)은 ‘생명과 자유와 부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르짖는 중산층이 등장함으로써 가능했다. 이 구호는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의 〈시민정부에 대한 제2논고(Second Treatise on Civil Government)〉(1690)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쟁은 1775년 4월에 벌어진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 군인들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한 식민지군 무기보급소를 공격하여 식민지 민병대와 충돌했다. 그때 누군가가(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총을 쏘았고, 그것을 기화로 8년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 전쟁의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의 경제

1787년에 제정되어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는 미국 헌법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천재의 작품이었다. 메인주부터 조지아, 애틀랜틱 해에서 미시시피밸리까지 전국에 설치되었던 경제특별허가지역은 이를테면 단일화된 ‘공동’ 시장이었다. 이곳에서는 관세도 없었고 주 간의 거래에 붙는 세금도 없었다. 그 외에도 헌법은 연방정부가 해외교역이나 주 간의 교역을 중재하고, 단일화된 파산법을 만들고 화폐를 발행하여 그 가치를 통제하고, 표준화된 도량형을 정비하고, 우체국과 철도를 건설하고, 특허권과 저작권을 관리하는 규정을 세우도록 명시해놓았다. 특히 20세기 말에야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지적 재산권’의 가치도 당시 사람들은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자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연방정부가 공개적인 보조금을 제공하고 수입품에 대한 보호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걸음마 단계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경제발전 계획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연방정부가 국립은행을 세우고 혁명전쟁시에 식민지가 떠안았던 공적 부채를 부담하라고 촉구했다. 새로운 정부는 해밀턴의 제안 중 몇 가지에 대해선 주저하기도 했지만, 관세 조항은 미국의 중요한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에 농부들은 국립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부자들의 뒤를 봐주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최초의 국립은행은 1791년에 허가를 받아 1811년까지 영업을 계속했고, 그후에는 후발 은행이 허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했다.

해밀턴은 미국이 운송려┒떱금융 등 다양한 산업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일반 국민들을 정치적럭姸╂?독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 철학을 갖고 있었다. 특히 소농을 ‘가장 귀한 시민’으로 칭송하였다. 1801년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1801~1809 재임) 그는 더욱더 지방분권의 중농민주주의를 장려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자, 서남부로

면화는 남부에서 가장 먼저 소규모로 생산했는데,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가 원면에서 씨앗과 불순물을 분리하는 조면繰綿 기계를 개발한 후로 면화 재배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남부의 농장주들은 당시 서쪽으로 이주해가던 농민들에게 땅을 사들였다. 그런 다음 노예들을 이용해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했고 몇몇 가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그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두 남부 출신들은 아니었다. 동부에서는 마을 전체가 이주하여 중서부의 비옥한 농토에 새롭게 정착하기도 했다. 흔히 서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거칠고 독립적인 성격에다 정부의 지배나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의 도움을 직럭A♣岵막?많이 받았다. 정부가 건설한 컴벌랜드 파이크(Cumberland Pike, 1818년)나 이리 운하(Erie Canal, 1825년) 같은 국립 도로와 수로는 새로운 정착민들이 서쪽으로 이주하고 훗날 서부의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많은 미국인들은 182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류 잭슨을 영웅으로 여겼다. 그가 변두리 지역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잭슨 대통령(1829~1837 재임)은 해밀턴이 세운 국립은행의 후발 은행을 설립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농민들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을 때 잭슨은 은행의 허가권을 부활시키는 데 반대했으며 의회의 지지도 얻어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국가의 금융제도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었고 1834년과 1837년에는 산업계에 공황이 일어났다.

19세기 들어 미국 경제는 주기적인 경제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속히 성장했다. 새로운 발명품과 금전적 투자가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키고 경제성장을 일구어냈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시장이 끊임없이 개방되었다. 증기선 덕분에 강을 이용한 운송이 더 저렴하고 빨라졌지만 철도의 발달만큼 파급효과가 크지는 못했다. 전국으로 뻗어나는 철로 덕분에 새로운 영토가 계속 개발되었다. 운하나 도로와 마찬가지로 철도 역시 초기에 건설될 때에는 정부에서 토지를 무상불하해주는 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더욱이 철도는 다른 교통수단과 달리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의 개인 투자가들의 구미를 당겼다.

변화무쌍한 시대답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계획들이 난무했다. 금융에 통달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저축했던 돈을 날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비전과 외국인 투자가 결합되고 금의 발견과 미국의 공적렌瑛?부가 투입되어 국가는 대규모로 철도를 건설하고 국가 산업화를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산업의 성장

유럽의 경우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아주 빠른 속도로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인구의 16퍼센트는 도시 지역에 살았으며, 국가 수입의 3분의 1은 제조업에서 나왔다. 도시화된 산업은 주로 북동부에 몰려 있었다. 신발제조업, 모직과 면직물 산업이 주도적이었고 기계류 산업도 활발하게 발달했다. 노동력의 상당수는 이민자 출신들이었다.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30만 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해마다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으며, 배를 타고 처음 도착한 항구 근처에 있는 동부의 도시에서 살았다.

한편 남부는 농업지대로, 자본과 공산품 등을 북부에 의존했다. 노예제도를 비롯해 남부의 경제적 수익은 남부가 연방정부를 장악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정치 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856년에는 산업화된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이 창당되었다. 1860년, 공화주의자들과 그들의 대통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경제정책에 관해선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1861년 그들은 보호관세의 채택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862년에는 최초의 퍼시픽 레일로드를 건설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1863년과 1864년에는 국립은행 규약의 초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1861~1865)에서 북부가 승리하자 국가의 운명과 경제적 시스템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남부의 대규모 목화 플랜테이션은 과거만큼 많은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에 북부의 산업은 전쟁 수요로 급격히 팽창하였다. 산업주의자들은 사회나 정치 문제를 비롯해 국가의 여러 분야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 남부의 농업귀족들은, 그로부터 70년 후에 만들어진 고전적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감상적으로 묘사되었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발명과 발전, 그리고 실업계의 거물

남북전쟁 이후 급속히 이루어진 경제적 발전은 현대 미국 산업경제의 초석이 되었다. 새로운 발견과 발명품이 급증하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다. 서부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었다. 타자기도 발명되었다. 철도에서는 냉동차가 생겨났다. 전화와 사진, 전구도 발명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마차를 대신하는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빛나는 위업과 함께 국가의 산업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남부에서 켄터키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산맥에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드웨스트 위쪽의 레이크 슈피리어 지역에서는 대규모 철광석 광산이 개발되었다. 이 두 가지 원료를 한군데로 모아 철강을 생산해내는 제철소도 번성했다. 대규모 동과 은 광산도 개발되었고, 뒤이어 납과 시멘트 공장들도 생겨났다.

산업이 번성함에 따라 대량생산 방식도 개발되었다. 19세기 말, 과학적 경영의 개척자인 프레드릭 W. 테일러(Frederick W. Taylor)는 근로자들에게 다양한 업무를 배분한 다음 좀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진정한 대량생산 방식은 1913년 헨리 포드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는 자동차를 생산할 때 종업원들이 한 가지의 간단한 작업만 담당하는 작업 라인을 설치하였다. 게다가 헨리 포드는 종업원들에게 일당 5달러라는 비교적 후한 임금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도록 함으로써 사업을 확장하였다. 당시로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경영방식이었다).

19세기 후반부의 ‘부호의 시대’에는 재계 거물의 신기원을 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거대한 재정왕국을 건설한 재계 거물을 이상적인 인물로 영웅시했다. 그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잠재력 있는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석유를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경제적 성공과 권력 추구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경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록펠러나 포드 외에도 제이 굴드(Jay Gould)는 철도로 많은 돈을 벌었고 J. 피어폰트 모건(J. Pierpont Morgan)은 금융업으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철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어떤 거물은 그 시대의 사업상 도의를 따르는 정직한 사람이었는가 하면 어떤 거물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힘과 뇌물과 배신을 이용하기도 했다. 좋든 나쁘든 사업상의 이권은 정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건은 가장 화려한 명성을 누렸던 기업가로, 개인으로도 사업가로도 대단한 번영을 구가했다. 그와 동료들은 도박을 하고 요트를 타고 사치스런 파티를 열고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으며 유럽의 예술작품들을 사들였다. 반대로, 록펠러나 포드 같은 사람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소박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고수했으며, 독실한 신도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꼈다. 인간적인 덕을 쌓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근면과 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훗날 그들이 남긴 유산은 미국에서 가장 큰 자선 재단을 설립하는 기금으로 쓰였다.

유럽의 상류층 지식인들은 대체로 사업을 경멸하는 편이었지만, 비교적 유동적인 조직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미국인들은 돈 버는 방법이라면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그들은 사업적인 모험과 흥미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 또는 안락한 삶 같은 잠재적 대가를 즐겼고 성공이 가져다줄 갈채를 마음껏 누릴 줄 알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미국 경제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자 자유분방하던 재계 거물들은 미국인의 우상으로서 그 빛을 잃었다. 주식회사의 등장과 함께 재계 판도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철도 사업이었으며, 이후 여러 분야에서 생겨났다. 경제계의 귀족들은 월급을 많이 받는 관리자이자 나중에는 회사의 대표가 되는 ‘전문가 출신 관리자’들로 대체되었다. 한편 주식회사가 부상하면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은 비즈니스의 권력과 영향력에 반작용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기술혁명은 새로운 기업가문화를 낳았으며, 또 한차례 부호의 시대를 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게이츠가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 말 그의 회사는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규제국에 의해 경쟁사를 협박하고 독점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제소되었다. 하지만 게이츠는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자선기금 기부자 명단에서도 최고가 되었다. 게이츠처럼 오늘날의 미국 사업가들은 대부분 고자세로 살지 않는다. 그들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지만 학교나 자선단체의 이사로 봉사하기도 한다. 또한 국가 경제나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정부 관료와 의논하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틀림없이 그들은 정부에 영향을 주지만 부호 시대의 몇몇 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개입

미국 역사상 초기에는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교통을 제외한 민간 부문의 사업에 연방정부가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들은 정부와 법을 제정하고 질서 유지에 필요한 일이 아닌 한 경제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레세페르(laissez-faire, 무간섭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후반 소규모 자영업자나 농민, 노동단체가 정부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중재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들은 비즈니스 엘리트와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벌이는 중서부 및 서부의 농부, 노동자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진보당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람들은 경쟁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가 경제 문제에 개입하길 원했다. 한편 그들은 공공 분야에서 벌어지는 부패와도 맞서 싸웠다.

1887년 의회는 철도회사의 관행을 규제하는 주간통상법(the Interstate Commerce Act)을 제정했고, 1890년에는 한 개의 대기업이 하나의 사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셔먼 반독점법, Sher-man Antitrust Act)을 발효시켰다. 그러나 이런 법은 1900년과 1920년 사이에 공화당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 재임), 민주당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913~1921 재임)과 기타 진보당의 이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강력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의 규제 기관인 주간통상위원회(the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 식품의약국,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와 같은 기관들은 모두 그 시기에 창설되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일은 특히 1930년대 뉴딜 정책이 시행되던 기간에 많이 증가하였다. 1929년의 증권시장 붕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적 혼란기인 대공황(1929~1940)을 초래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펼쳤다.

오늘날 미국 경제를 특징짓는 주요 법안이나 기관들이 탄생한 것은 대부분 뉴딜 시대였다. 뉴딜 법안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금융, 농업, 공공복지 분야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시간당 수당에 대한 최소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철강이나 자동차, 고무산업으로 노동운동이 확대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국가가 경제를 움직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나 기관들은 거의 그 시기에 창설되었다. 여기에는 주식시장을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 은행 예금을 보증하는 연방예금보험공사, 그리고 노인들이 젊었을 때 납부한 기금을 가지고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사회보장 시스템 등이 있다.

뉴딜 법안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기업과 정부가 서로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 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폐기되기도 했다. 뉴딜 법안 가운데 생명력이 가장 짧았던 것은 국가산업부흥법(the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으로, 국가의 감독하에 기업의 관리자와 근로자들이 갈등을 해소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이었다. 미국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가 타협했던 것처럼 전체주의로 기울었던 적은 없지만, 뉴딜 정책의 제안자들은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라는 경제 주체들 사이에 새로운 권력을 분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일은 전쟁이 일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당시에 전시생산국(the War Production Board)은 군수품 조달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지도록 국가의 생산능력을 조절하였다. 따라서 소비자들 위주로 생필품을 생산하던 공장에서 군사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서는 탱크와 비행기를 만들었고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의 무기고’가 되었다. 국가의 수입이 증가하자 정부는 생필품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것을 막으려고 물가관리국(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을 신설하여 주택임대료를 억제하고 설탕에서 석유까지 모든 생필품을 배급제로 바꾸었으며 다른 경우에도 물가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후 경제 : 1945∼1960년

많은 미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군사비 지출이 삭감되면서 곧장 대공황 때의 시련기로 되돌아가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억눌려왔던 소비욕구가 분출하면서 전후 경제성장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자동차산업은 성공적으로 원래의 자동차를 만드는 일로 다시 돌아갔고, 항공기 제작이나 전자제품 생산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성큼성큼 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주택자금을 쉽게 대출해주자 주택건설 붐이 일어났다. 국가의 총생산량이 1940년의 2천억 달러에서 1950년이 되자 3천억 달러로, 그리고 1960년에는 5천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와 함께 ‘베이비 붐’이라고 하는 전후 출산율이 크게 증가하면서 소비자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더 많은 미국인이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다.

군수품 생산의 필요성은 군수산업을 거대하고 복잡하게 발전시켰다(군수산업이라는 용어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만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위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미국은 소련과 냉전체제에 돌입함으로써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유지해야 했다. 또 수소폭탄 같은 정교한 무기를 연구하기 위해 군사비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 더욱이 마샬 플랜(Marshall Plan)에 따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국가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미국 물자의 시장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정부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1946년에 제정된 고용법은 ‘고용과 생산과 구매력을 최대한 장려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미국은 전후에 국제적인 통화관리를 재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선두에 서서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l Monetary Fund)과 세계은행(World Bank)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이 기구들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개방경제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로 세워졌다.

그러는 사이 기업은 합병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기업들은 거대하고 다양한 복합기업으로 합병되었다. 예를 들어 국제 전신전화회사(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는 쉐라톤 호텔과 콘티넨탈 은행, 하트포드 화재보험, 아비스 렌터카 등의 여러 기업을 사들였다.

노동력의 성격도 크게 변화하였다. 1950년대 들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제조업에 종사는 근로자들의 숫자에 육박하더니 얼마 안 있어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더 많아졌다. 1956년경 미국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생산직보다 화이트칼라 위주였다. 동시에 노동조합은 장기고용 계약을 맺고 직원들에게 다양한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농민들에게는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다. 농업이 대규모로 기업화됨에 따라 곡물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생산되었다. 소규모 가족 영농은 점점 더 경쟁력을 잃었고, 결국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났다. 그 결과, 1947년에는 790만 명이던 농업인구가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1998년에는 겨우 340만 명이 농업 관련 일에 종사했다.

농민이 아닌 사람들도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핵가족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도심을 떠나 교외로 이주했다. 에어컨이 발명되자 남부와 남서부의 휴스턴, 애틀랜타, 마이애미, 피닉스와 같은 이른바 ‘선 벨트(Sun Belt)’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부의 주도하에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교외 지역으로 나가는 일이 한결 쉬워졌으며 산업 형태도 변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8개밖에 없던 쇼핑센터가 1960년에는 3,840개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사람들이 교외로 이주하고 많은 산업들도 이를 뒤따라가자 자연스럽게 도시공동화가 진행되었다.


변화의 계절 :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인들에게 1950년대는 만족스러웠던 시기인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대격변의 시대였다. 세계적으로 신생국가가 탄생했으며 기존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이 일어났고, 미국에 맞먹을 만큼 경제적인 강국으로 성장한 나라도 생겨났다. 또한 경제력 있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군사력만이 성장과 확대의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인식이 점점 커져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1961~1963 재임)은 강력한 통치력을 지니기 위해 행동주의자적인 접근방법을 활용했던 선도적인 인물이다. 그는 1960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프런티어’의 도전에 대응하라고 외쳤다. 대통령이 된 그는 정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삭감함으로써 강력한 경제성장책을 썼으며, 노령자를 위한 의료 지원을 강력히 지시하고 대도시 빈민촌을 구제하며 교육 기금을 확충했다. 미국인을 개발도상국으로 파견하여 지원하려는 케네디의 비전은 평화봉사단의 설립으로 현실화되긴 했지만 그가 제안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실행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또 케네디는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죽은 후에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은 소련을 뛰어넘었고 1969년에는 미국인 우주비행사가 달에 착륙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63년 케네디의 암살로 국회는 그의 입법안을 대부분 법률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후임인 린든 베인즈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63~1969 재임)은 더 많은 시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나누어주는 ‘그레이트 소사이어티(Great Society)’ 정책을 펼쳤다. 정부가 메디케어(고령자를 위한 의료보험제도), 푸드 스탬프(빈곤층을 위한 식량지원), 수많은 교육사업(학교나 대학 설립은 물론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업)과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시하다보니 연방정부의 지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면서 군사비 지출도 늘어났다. 케네디가 재임할 당시엔 소규모 국지전으로 시작했던 것이 존슨 재임 기간에는 군사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비 지출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난과의 전쟁과 베트남전쟁 모두 단기간에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책으로 세금을 인상하는 데 실패하면서 성장률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1973년과 1974년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회원들 간에 석유생산량을 줄이기로 결정함에 따라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고 에너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심지어 생산량 감축이 끝난 후에도 에너지 가격은 계속해서 오르고, 거기다 인플레이션까지 겹쳐서 실업률도 높아졌다. 연방정부 예산은 적자였고 외국과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주식시장은 침제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지지부진하게 1975년까지 계속되었고 탄핵 위기에 처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 1969~1974 재임)은 사임했고, 미국인들이 1년 넘게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는 경제문제를 비롯해 어떠한 사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에서부터 강철,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값도 싸고 품질도 좋은 수입품들이 늘어나자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기업활동이 침체되고 실업률이 계속해서 높아지는 경제 상황을 가리켜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한다. 사실 인플레이션은 그 자체로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더 많다. 사람들은 물건 가격이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사들인다. 이렇게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도 상승하고, 임금 인상에 대한 요구도 생겨나며 물가는 더욱 오르고 다시 수요와 가격 등이 따라서 올라가게 된다. 근로계약서에는 생계비에 관한 항목이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고, 정부는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척도인 소비자 물가지수에 따라 사회보장 따위의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근로자나 퇴직자들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도록 도와주긴 했지만 끝없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방치한 꼴이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기금은 자꾸만 늘어나서 적자 예산이 되었고, 정부는 차관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자 압박을 받으며, 기업과 국민들의 부담은 더욱 증가했다. 에너지 가격과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기업의 투자는 감소하고 실업률은 위험수위까지 올라갔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취임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1977~ 1981 재임) 대통령은 경제의 악순환을 타파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 실업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으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근로자들이 스스로 임금을 내리고 생산자가 가격을 낮추도록 정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대신 항공, 화물트럭, 철도를 비롯해 여러 산업의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완만하게 인플레이션을 잡았던 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산업은 그동안 요금이나 노선 등에서 정부의 철저한 보호와 규제를 받아왔다. 이러한 규제 철폐는 카터 행정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은행 이율이나 장거리통신 요금에 대한 통제를 완화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지역전화 요금에 대한 규제마저 풀어주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통화 공급을 단속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통화량의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이율을 올렸다. 그 결과, 소비자 지출과 기업 대출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경제는 곧 깊은 침체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0년대 경제

1982년 내내 미국은 깊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년도에 기업은 50퍼센트나 도산했다. 특히 농민들이 타격을 많이 입었다. 농산물 수출이 줄어들고 곡물 가격이 떨어졌으며 이자는 올라갔다. 이에 정부는 급히 해결책을 모색했다. 경기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 급히 처방한 치료약은 삼키기엔 힘이 들었지만, 경제가 처해 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었다. 1983년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경제는 반등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성장도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내내,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도 인플레이션 비율은 5퍼센트 아래를 밑돌았다.

1970년대의 경제 격변은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인들은 1980년에 카터를 낙선시키고, 헐리우드 배우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1981~1989 재임)을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연방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레이건 정부는 세율을 줄여서 수입을 늘리는 공급 측면 경제학 이론에 충실한 경제정책 기조로 나아갔다. 이 이론은 세율을 낮춤으로써 사람들이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면 결국 더 많은 저축과 투자가 이루어져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레이건이 추진한 감세정책은 주로 미국의 부유층에게로 이익이 돌아갔지만, 감세정책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기업투자가 많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일자리도 많아지고 임금도 올라가기 때문에 저소득층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건이 생각했던 국가적 아젠다의 중심주제는 연방정부가 그동안 너무 비대해졌고 경제에도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에 그는 세금을 삭감하는 동시에 사회 프로그램을 수정하는 대수술에 들어갔다. 또 임기 내내 소비자나 근로현장, 그리고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 규제를 줄이거나 철폐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의 전철을 밟아 군사력 증강에 소홀해질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국방비 예산을 크게 늘렸다.

감세에다 높은 국방비 지출은 국내 정책에 지출해야 할 예산을 더욱더 삭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결국 연방 예산적자는 1980년대 초의 경기침체기 때보다 훨씬 불어나게 되었다. 연방정부의 적자는 1980년에 740억 달러에서 1986년에는 2,21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87년에는 1,500억 달러로 떨어졌지만 이후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연방정부의 과다한 지출과 차입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물가상승을 조절하기 위해 불침법을 서면서 위험신호가 보일 때마다 재빨리 이자율을 인상했다. 의장인 폴 볼커(Paul Volcker)와 그의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의 지휘하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경제의 교통경찰 역할을 수행하면서 국가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데 의회나 대통령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1980년대에 비로소 경제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농민들, 특히 소규모 가족영농을 하는 농민들은 계속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특히 1986년과 1988년에 미국의 중부 지방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고 몇 년 후에는 홍수를 겪었다. 몇몇 은행은 금융 경색에 무분별한 대출 관행으로, 특히 저축대부조합이라고 하는 곳은 부분적인 규제완화 이후 흥청망청 대출을 남발하다가 휘청거리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이런 금융 기관들의 문을 닫게 하고, 납세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면서 예금자들에게 예금액을 지급해주었다.

레이건과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1989~1993 재임) 대통령 임기중에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했고, 1980년대에도 1970년대에 국가를 괴롭혔던 경제적 병폐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은 1970년대 들어서는 10년 중 7년 동안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무역적자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게다가 빠르게 성장한 아시아는 경제의 발전소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특히 장기적인 경제계획과 기업, 정부, 금융이 긴밀히 관계를 맺고 효율적으로 협력했던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경제성장의 대안적인 모델처럼 보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기업들의 주식 가격을 끌어내린 뒤 재가공하여 경영권을 되팔거나 분해하는 ‘기업사냥꾼’이 등장했다.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자기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거나, 아예 기업사냥꾼에게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런 다툼을 우려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업사냥꾼이 좋은 기업을 망가뜨리고 근로자들에게 슬픔을 안겨주며 기업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냥꾼이 경제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인수하여 조직을 슬림화한 후 다시 수익을 내는 회사로 변신시키거나, 투자자들에게 되팔아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게 하고 그들이 재투자하여 생산성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1990년대를 지나서

1990년대에는 새로운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1993~2001 재임)이 있었다. 신중하고 온건한 민주당원이었던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과 몇몇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의료보험 수혜자를 확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의회에 의해 좌절된 후 클린턴은 미국에서 ‘큰 정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몇몇 부문에서 시장세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의회와 함께 지역 통신 서비스를 경쟁체제로 개방하였다. 또한 복지혜택을 줄이기 위해 공화당과 손을 잡기도 했다. 클린턴은 지속적으로 연방정부의 업무 영역은 줄여나갔지만 국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뉴딜 정책의 중요한 혁신 과제 대부분과 그레이트 소사이어티 정책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계속해서 경제활성화의 전반적인 속도를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이 재발되는 징후가 보이는지 감시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급속히 튼튼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몰락하면서 그들과 교역할 기회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기술 발전은 복잡하고 새로운 전자제품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원격통신과 컴퓨터 네트워킹 분야의 기술혁신은 방대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전시켰고 기업들의 운영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기업의 수익은 놀랄 만큼 증가했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실업률, 거기에다 높은 수익성으로 주식시장이 폭등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1970년대에 겨우 1000포인트였던 것이 1999년에는 11,000포인트를 기록했고,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부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반면에 1980년대 미국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던 일본 경제는 장기 침체로 돌입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더 유연하고 덜 계획적이고 더 경쟁적인 미국 방식이 새로운 세계경제 통합 환경에는 더 나은 전략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국의 노동력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특색 있게 변화했다. 장기적인 추세에 따라 농민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게 점원에서 재정분석가까지 다양한 서비스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더이상 철강과 신발이 미국의 제조업을 이끌어가지 않았으며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1992년에 2,900억 달러로 최고를 기록한 후 연방예산은 경제 성장으로 세수는 늘어났지만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1998년 정부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비록 베이비 붐 세대에게 지급할 미래의 사회보장기금 형태로 많은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빠른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낮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자 이에 놀란 경제학자들이 지난 40년 간의 경험을 근거로 들며 과연 미국의 ‘새로운 경제’가 언제까지 빠른 성장을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미국 경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세계경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무역장벽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했다. 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NAFTA)은 미국과 가장 큰 교역상대국인 캐나다와 멕시코 간의 경제적 유대를 한층 더 돈독히했다. 19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아시아는 유럽과 함께 완성품의 주요 공급자이자 미국 수출품의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세계 통신 시스템은 세계의 자본시장을 하나로 연결시켜주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계경제 통합이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되지만 상호의존도가 깊어지면 그만큼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첨단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미국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은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지만 전통적인 제조업 부문에서는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임금 수준이 내려가는 추세이다. 1990년대 말 일본과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 휘청거리자 세계 금융시스템에 충격파가 밀려왔다. 미국의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국내 경제의 방향을 잡는 데 있어 세계경제의 상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여전히 미국인들은 자신감을 회복한 채 1990년대를 마감했다. 1991년 3월부터 1999년 말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미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긴 평화기를 누렸다. 1999년 11월 현재 실업률은 겨우 4.1퍼센트로 3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소비자물가는 1998년에 겨우 1.6퍼센트 상승했고(1964년 이후 1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조금씩 증가했다), 1999년에 다소 빠르게 상승했다(10월에 2.4퍼센트). 여전히 많은 도전들이 도사리고 있지만 미국은 20세기를 헤쳐오면서 더욱 튼튼해졌다.

 

출처: http://www.google.co.kr/url?sa=t&rct=j&q=&esrc=s&frm=1&source=web&cd=3&ved=0CEQQFjAC&url=http%3A%2F%2Finfopedia.usembassy.or.kr%2FKOR%2F_f2_030403.html&ei=KInPUfqABISEkgW9woHgAg&usg=AFQjCNGKinTfD0ESPHzQjx0rKRklrFhc3Q&sig2=ZDsUk-ncsTq9Lf8fUE2GzA&bvm=bv.48572450,d.dGI&cad=rj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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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변화 - 괴물의 탄생 1부 요약

경제흐름 2013.06.30 10:23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변화 -『괴물의 탄생』 1부 요약

 
'국가'의 어제와 오늘 (15~18쪽)

1651년,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 모두가 생존을 위해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너무 
        피곤한 것이라서, '괴물' 즉 '레비아탄'에게 각자의 권리 
        일부를 양보함으로써 오히려 각자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국가라는 것이 탄생
         (국가의 기원에 대한 표준적 이론)
1776년,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공식적으로 출발
1867년, 칼마르크스의 『자본론』1권
      - 이와 함께 국가에 대한 찬양에서부터 폐지를 주장하는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이론이 등장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 1929년의 세계대공황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등장하면서
         이후 50년간 국가이론의 전성기를 맞이함
1980년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신자유주의' 등장
     - '세계화', '금융화', '주주자본주의'라고도 불림 

  한국 경제의 문제는 외견상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극우파만으로 구성되어 좌파가 멸종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가깝다. … '주류 극우파'와 '비주류 극우파' 사이의 경쟁에 의한... (19쪽)

  유럽에서도 일종의 '시소 현상' 같은 것들이 있어서, 좌파가 집권하면 우파들이 했던 정책들을 상당 부분 폐기하거나 취소하고, 우파가 집권해도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길게 보자면, 언뜻 볼 땐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말로 괜찮은 정책들이 특정 국민경제의 진화적 수렴점으로 남게 된다. 정말 좋은 정책이 아니었다면, 정권이 바뀔 때 폐기되어 버리므로, 결국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정책들이 남게 된다. … 정권이 바뀌어도 특정 국가의 특수한 상황과 맥락 내에서 우수한 제도들이 결국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27~28쪽)

  흔히 정치에서 한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 최소한 10년 정도 기존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을 보완하거나 혹은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기간을 갖게 된다. … 영국의 전 총리 토니 블레어와 현 총리 고든이 '제3의 길'을 모색할 때 그랬었고, 레이건에서 아버지 부시로 이어지는 공화당 집권기에는 클린턴과 그의 동료들이 '신경제'를 준비하면서 냉전시대의 국방논리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제논리로 설명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클린턴의 연임 기간 중 미국의 네오콘들은 '비대칭적 전쟁'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국방논리를 중심으로 일련의 논리체계를 만들어내었다. … 그런데 지금 한국을 둘러보면, 좌파 진영에서도 한국 경제의 문제점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깊이 고민하는 그룹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29쪽)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마치 클린턴 시절의 김대중처럼 적절한 파트너를 만나지 못한 불운한 대통령일지도 모른다. 이명박이 5년 전에 대통령을 했거나, 아니면 노무현이 5년 후에 대통령을 했다면, 한국 경제의 양상이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34쪽)

  대개의 파시즘 지도자들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거나 거부하기 어려운 하나 이상의 미덕이나 매력을 갖추고 있다. 간단히 얘기하면,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포퓰리즘' 단계가 극우파와 결합되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고전적 파시즘'이 발동할 조건이 만들어진다. …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도 그런 개인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그가 가지고 있다는 돈이 아름다울 수는 있고, 그의 어깨 위에 얹힌 성공 신화가 아름다울 수는 있다. 그러나 히틀러나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그런 개인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34~35쪽)

  나치는 실제로 좌파로부터 나왔던 파시즘이었고, 박정희는 우파로부터 나왔던 파시즘이었다. 그렇다면 혹여 MB 파시즘이 등장한다면? 그건 '건설'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35쪽)


자본주의가 가장 아름다웠던 18세기 (55~57쪽)

단선론적 역사관 :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세상은 가난했다가 점점 부유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것이 곧 역사라고 본다는 점에서 '성장주의'
      - 스탈린 시대 용어로는 '사적 유물론'

백남운 (마르크스 역사적 보편주의와 단선론적 역사관에 기반)
      - 일본 사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한국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됐을 것이므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중요
      - 원래 한국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에 따라 노예제도 있었고, 중세도 있었고,
         따라서 자본주의도 발전할 터였는데, 중간에 일본이 끼어들면서 이상하게 되었음

  1990년대 이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화를 '세번째 세계화'라고 부른다면 '첫번째 세계화'는 바로 이 콜럼버스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유럽의 원거리 항해로 시작된 것이지요. 물론 '두번째 세계화'는 19세기에 진행되었던 유럽의 제국주의화를 말하는 거구요. 이렇게 처음으로 유럽이 다른 세계를 만나며 취했던 방식은 대단히 약탈적이었습니다. (58쪽)

  화폐 자체를 부의 최종적 결과로 여겼던 스페인은 중남미의 고대 문명을 무너뜨리고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본국으로 실어 날랐는데, 결론적으로 이런 막대한 귀금속의 축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스페인은 내부로부터 경제적 붕괴가 일어납니다. 결국 16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해적 선장 드레이크를 해군 제독으로 고용한 엘리자베스 1세의 해군에게 패배하게 되고, 이로써 세계사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59쪽)

  애덤 스미스가 등장할 때까지도 팽배해 있던 중상주의, 즉 화폐가 모든 것의 최종적 목표이자 돈을 많이 갖는 것이 국가의 부와 영예를 키워주고 높여준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국부론』의 저술 목표였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생산과 교환 같은 실질적인 경제행위를 강조했고 … 금이나 은 따위를 많이 갖는 게 결코 국가의 부와는 상관없다는 게 『국부론』의 핵심적 주장이었습니다. … 전쟁 따위를 해서 다른 나라의 은을 가지고 온다고 국가가 잘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게 정말로 애덤 스미스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62쪽)

  애덤 스미스가 대단한 것은 … 국민경제 프레임에 대한 개괄적인 밑그림을 그려낸 데에도 있습니다. 중세를 지배하던 귀족들을 '지주'라는 이름으로 한 단계 격하시켰고, 이제 농노에서 노동자로 새로운 시민이 될 사람들에게는 '임금'이라는 장치로 그들이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20세기 내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기업들을 향해서는 '견제'라는 메시지를 던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조율할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의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 놓았습니다. (66쪽)


위기 그리고 또 위기 :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등장 (76~83쪽)

18세기 : 자본주의가 가장 아름답던 시기

19세기 : 문학과 과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
            →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기를 열었던 19세기는 18세기의 희망 뒤에 감춰진 음울함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시기
            → 더불어 19세기는 혁명과 호사스러움과 지독한 가난이 공존했던 시기
                                                          ↓
                새로운 전환에 대해 말하기 시작 (자본주의의 첫번째 위기) :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등장

20세기 초 : 러시아혁명과 함께 20세기 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가 대립하는 시기
                사회주의 출현 이후 새로운 위기 등장 (자본주의의 두번째 위기) 
                → 기업과 자본의 투자관계, 즉 '과잉축적'의 문제 → 1929년 대공황 발생
                                                                                   ↓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출간
                                                                 by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36년)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ll die)"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시장만으로 지탱하려는 자본주의 경제는 무너진다.
                                                                                   ↓
                                          정부의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기본으로 하는 '거시경제학' 태동
                                              이 때 출범한 루스벨트 대통령을 통해 실현 (수정자본주의)
                           자연의 법칙처럼 시장의 법칙을 통해 다 잘 될 거라는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이 무너져 내림
                                         국가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라던 20세기 초반의 믿음이 무너져 내림

  자본주의가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는 18세기였지만, 이 시스템은 이후 두 번에 걸친 결정적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첫번째 위기 국면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이 등장하고, … 두번째 위기인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등장하게 되고, 자본주의는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지게 됩니다. (87~88쪽)

  어쨌든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나라가 재건을 시작하는 순간, 세상은 케인스 방식이나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처럼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려고 했던 복지국가 모델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1세계를 형성했지요. 국가가 시장과 사유재산을 철폐하려 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은 제2세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제국주의 아래 신음하다 독립하게 된 나라들은 … 제3세계로 분류하게 됩니다. (88~89쪽)


국가와 시장의 경쟁, 그리고 제3부문 (90~93쪽)

1945년(종전/냉전체제 형성)~1974년(1차석유파동) 
      - '영광의 30년' (유럽과 미국 경제)
         대량생산 대량소비(mass production, mass consumption)
         포드주의(Fordism), 풍요의 시대(Age of opulence), 19세기와 비교해 '후기 산업화시대'
      - 노동자들은 생산적 주체이자 소비의 주체
      -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통한 공공보험, 퇴직연금 개설 등 노동조건 향상 → '노동귀족' 발생

그러나!
사미르 아민(Samir Amin)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경제학이론인 '주변부 자본주의론' 혹은 '종속이론'에 의하면...

  제국주의의 변형된 '수탈' 과정을 통해 유럽이 누리고 있던 번영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그들이 적절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 너무 싼값에 사가면서 거둬들인 '수탈한 부'의 결과라는 것 … 이때 발생한 불합리한 상황을 '부등가 교환'이라고 불렀습니다. … 그 덕분에 겨우 노동자에 불과함에도 유럽의 노동자들이 귀족적 삶을 살고 있다는 거지요. (94~95쪽)

1974년 석유파동과 이란의 정치, 경제적 혼란으로 1979년 2차 석유파동이 빚어지면서 제1세계 동요
1980년대 각기 다른 세 명의 지도자들이 등장 :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프랑스의 미테랑 (96~97쪽)
      - 미테랑 : 좌파 출신, 르노자동차를 비롯한 주유 기업을 국유화하면서 공공 부문 강화
      - 레이건과 대처 : 조세를 줄이고 국가 기간산업을 비롯한 일련의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면서 정부 규모 축소 

  1980년대는 미테랑을 축으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형태로 자본주의를 이끌어 나가려 했던 좌파들의 힘과, 영국과 미국을 축으로 시장 이데올로기와 기업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며 나타난 스태그플레이션(경기는 침체되는데도 가격이 높아지는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일종의 복합불황)을 해소하려고 했던 우파들의 힘이 맞붙었던 시기였습니다. 1980년대, 불안하기는 했지만 어느 한쪽으로 저울추가 기울지는 않았습니다. 이 힘겨루기를 종료시킨 게 바로 1990년의 동구권 붕괴였습니다. (97쪽)

1990년대 : 세계화, 금융화, 주주자본주의의 등장 (98~99쪽)
      - 시장논리를 앞세운 대기업들의 등장 : 개별 국민경제는 물론이고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의 경계를 허뭄
      - 하지만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속에서 기업이 국가를 누르고 지배적 위치에 올라서지는 못함
         → 국가와 기업 외의 또 다른 제3부분(시민경제, 사회경제, 협동조합 등)이 존재하기 때문
            (호혜나 공정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경제 혹은 지역공동체주의)

  국가가 주도하거나 기업이 주도한 경제들은 1990년대 중, 후반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반면에 제3의 영역이 국가와 기업 사이에서 '버퍼'(buffer) 역할을 하면서 두 부문을 적절히 견제하던 현상이 특징적인 나라들, 즉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이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돌파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101~102쪽)


  ※ 경제분야와 관련하여 제가 즐겨 있는 책들 중에는 장하준 교수와 우석훈 교수의 책들이 많습니다. 그 중 우석훈 교수가 출판한 『괴물의 탄생』, (서울: 개마고원, 2009) 中 1부 -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변화"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출처: http://isoonstar.tistory.com/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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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경제흐름 정리

경제흐름 2013.06.30 10:14

출처: http://www.okjsp.net/bbs?seq=199214

 

30년대 공황 --> 케인즈이론으로 극복
--- 이 중간 기간은 번영의 시대 (거시경제는 케이즈만 존재 했슴)
70년대 후반 석유파동 및 불황 --> 통화주의이론으로 극복
80년대 레이거니즘 활황--> 통화주의이론 + 신고전학파
90년대 조지부시 + 클린턴 불황(쌍둥이적자,실업율상승) --> 신케인즈이론
2000년대 조지부시2세 + 불황 금융위기 --> 신고전학파 + 신자유주의
현재 그리스등 유로위기 --> 신케인즈 부활 + 자본주의 4.0

이런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면서 흘러왔습니다.
결국 조금씩 거시경제학은 이론적으로 정교해졌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죠

모든 경제이론은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었다면) 자유경쟁 시장이론을
지지 합니다 단지 작은정부이냐? 큰정부이냐? 이런차이가 있죠

시장시스템 자체를 비난하기 보다는 (시장에서)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가?
왜 불황은 지속되는가? 이런것을 파악하는게 경제학의 목적입니다
미리 예측은 어렵지만 불황의 조짐이 보이면 이것을 알아채고
정부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것이 경제학자가 하는일이죠

제 소견에 세계겅제를 G10 국가중심의 단일 경제 모델로 가정하면
각국의 재무장관이 정책조절 (케인즈 주의든 , 신자유주의든)
협력을 하면 마치 미국이 경제불황을 극복하는것 처럼
세계 경제도 극복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단기적 불황은 몇번 있겠지만 대공황같은것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애플/삼성 분쟁처럼 애국심에 호소하는 보호주의 무역이 활성화되면
세계 경제는 몰락하겠죠.

케인즈 이론과 신케인즈 이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통화주의와 신고전학파의 차이점 ?

어떤 경제이론이 득세하는 시기의 미국에서 정치권력구조

이런 경제이론들은 시장모델을 어떤 가정(assumption)으로 이론을 전개하는가?

신자유주의 이론의 뿌리는 어떤 경제이론에서 출발하는가?

이런것을 인문교양책 읽듯이 공부하신다면 혹시 개발자분들이
주식투자하면서 장기 전망을 하실때 많이 도움이 될겁니다

그리고 논리력 및 문장력 증가 시키는데도 도움이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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